Thank you. I’m honored to be with you today for your commencement from one of the finest universities in the world. Truth be told, I never graduated from college, and this is the closest I’ve ever gotten to a college graduation. Today, I want to tell you three stories form my life. that’s it No big deal. Just three stories.
감사합니다. 세계 최고의 명문 중 하나인 이 곳에서 졸업축사를 하게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사실, 나는 대학을 졸업조차 못했고, 이렇게 대학 졸업식 가까이 서 본 적도 없습니다. 오늘, 나는 내 인생에서 겪은 세가지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대단한 것은 아니고요, 딱 세가지 이야기입니다.
The frist story is about connecting the dots.
I dropped out of Reed College after the first six months, but then stayed around as a drop-in for another 18th months or so before I really quit. So why did I drop out?
It started before I was born. My biological mother was a young, unwed graduated student, and she decided to put me up for adoption. She felt very strsongly that I should be adopted by colledge graduates, so everything was all set for me to be adopted at birth by a lawyer and his wife except when I popped out they decided at the last minute that they really wanted a girl.
So my parents,who wereon a waiting list, got a call in the middle of the night asking, “We’ve got an unexpected baby boy; do you want him?” They said, “Of course.” My biological mother found out later that my mother had never graducated from college and that my father had never graduated from high school. She refused to sign the final adoption papers. She only relented a few months later when my parents promised that I would go to college. This was the start in my life.
첫번째 이야기는 순간들의 연관성에 관해서입니다. 나는 리드칼리지에 입학한 지 6개월만에 그만두었습니다. 18개월 동안은 실제 그만두기 전까지 청강생이었고요. 왜 내가 그만두었을까요? 그 이유는 내가 태어나기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나의 생모는 어리고 결혼도 하지 않은 대학원생이었습니다. 나의 생모가 나를 입양시키기로 결심한 후 최소한 대학은 졸업한 사람들에게 선택되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래서 나의 출생시 변호사 가정에 입양되기로 모든 것이 잘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내가 태어나기 직전 그들이 여자아이를 원한다고 결정하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그래서 대기자 명단에 있던 나의 부모님은 한밤중에 전화를 받았습니다. “예정에 없던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를 원하세요?” 나의 부모님은 말했습니다. “물론이죠.” 그러나 나의 생모는 나의 (양)어머니는 대학도 졸업하지 못했고 나의 (양)아버지는 고등학교 근처에도 못 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는 입양동의서에 서명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몇 개월이 지나서 나의 부모님이 대학에 꼭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서야 마음이 누구러졌습니다. 이것이 내 인생의 출발점이었습니다.
And 17 years later I did go to coleege. But I naively chose a college that was almost as expensive as Stanford, and all of my working-class parents’ saving were being spent on my college tuition. After six months, I couldn’t see the value in it. I had no idea what I wanted to do with my life and no idea how college was goignt to help me figure it out. And here I was spending all the money my parents had saved their entire life.
17년이 지난 후 나는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순진하게도 스탠포드대학만큼이나 비싼 대학을 선책했습니다. 평범한 봉급생활자였던 나의 부모님이 저축한 돈 전부가 나의 학비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6개월이 지난 후 나는 그만한 가치를 대학교육에서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내가 내 인생에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대학이 인생의 목표를 찾도록 도와주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나의 부모님이 일생동안 저축한 돈이 여기에 다 쓰여지고 있었습니다.
So I decided to drop out and trust that it would all work out okay. It was pretty scary at the time, but looking back it was one of the best decisions I’ve ever made. The minute I dropped out I could stop taking the required classes taht didn’t interest me, and beging dropping in on the ones that looked far more interesting.
It wasn’t all romantic. I didn’t have a dorm room, so I slept on the floor in friends’ rooms. I returned coke bottles for the five cent deposits to buy food with, and I would walk the seven miles across town every Sunday night to get one good meal a week at the Hare Krishna temple. I loved it.
그래서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믿으며 자퇴를 결심했습니다. 그 당시는 끔찍했지만, 그러나 돌이켜보면 이제껏 내린 최고의 결정중 하나였습니다. 당시 자퇴를 하자 나는 흥미없었던 필수 과목대신에 보다 재미있는 강의를 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것이 낭만적인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기숙사에 머물 수 없었기 때문에 친구의 집 거실에서 자기도 했고 먹을 것을 사기위해 오센트짜리 병을 팔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마다 맛있는 한끼 식사를 먹기 위해 시내를 가로질러 7마일을 걸어서 헤어 크리쉬나 사원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그 식사는 정말 맛있었습니다.
And much of what I stumbled into by follwoing my curiosity and intuition turned out to be priceless later on. Let me give you one example. Reedd College at that time offered perhaps the best calligraphy instruction in the country.
Throughout the campus every poster, every label on every drawer, was beautifully hand calligraphed. Because I had dropped out an didn’t have to take the normal classes, I decided to take a calligraphy class to learn how to do this.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 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나의 호기심과 직감만을 따라 비틀거리며 길을 찾던 그 많은 순간들이 후에 값을 매길 수 없는 귀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한가지 예들 들어보겠습니다. 리드 칼리지는 아마도 당시 미국 최고의 서체 교육을 제공했습니다.
학교를 가로질러 여기저기에 붙어있는 포스터, 서랍에 붙어있는 상표들은 손으로 쓴 아름다운 서체였습니다. 나는 자퇴해서 정규과정을 이수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어떻게 서체를 다루는지 서체과정을 배우기로 결심했습니다. 나는 세리프와 산 세리프체를 배웠는데 다양한 형태의 자간의 조합이 만들어내는 굉장히 멋진 글씨체였습니다. 그것은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인 미묘함으로 과학적인 방식으로는 따라잡기 힘든 것으로 나는 매료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any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g the first Macintosh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e Mac.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e “Mac” would have never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And since Windows just copied the Mac, it’s likely that no personal computer would have them.If I had never dropped out, I would have never dropped in on that calligraphy class, and personall computers might not have the wonderful typography that they do. Of course it was impossible to connect the dots looking forward when I was in college. But it was very, very clear looking backwards 10 years later.
내 인생에 있어서 서체 교육의 그 무엇도 어떤 실질적인 유용성은 없어보였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 우리가 최초로 매킨토시의 컴퓨터를 구상할 때 서체교육과정에서 배운 것들은 고스란히 되살아 났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설계한 서체를 맥 속에 집어넣었습니다. 그것은 아름다운 서체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만약 내가 학교를 자퇴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절대 그 서체수업을 들을 수 없었을 것이고 개인용 컴퓨터에는 지금과 같은 놀라운 인쵀술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내가 대학에 있을 때는 그 순간들이 제 미래에 어떻게 연결되는지 아는 것을 불가능했습니다. 그러나 10년이 지나 돌이켜보면 과거와 미래의 연관성은 매우 매우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Again, you can’t connec the dots looking forward; you can only connect them looking backwards.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So you have to trust that the dots will somehow connect in your future. You have to turst in something – your gut, destiny, life, Karma, whatever – because believing that the dots will connect down the road will give you the confidence to follow your heart, even when it leads you off the well – worn path, and that will make all the differnece.
다시 강조하자면, 여러분은 지금 이 순간들을 통해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단지 이 순간들을 통해 과거를 돌이켜 볼 수 있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장차 지금 이 순간들이 어떻게든 미래와 연결될 것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배짱, 운명, 인생, 인연이든 무엇이든 간에 여러분은 그 무엇을 믿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현재의 순간이 미래와 연속선상의 길위에 놓여있다는 믿음이 여러분의 진심을 따라갈 수 있도록 자신감을 심어줄 것이고, 설령 여러분이 힘든 때에도 현재와 미래가 어떤식으로든 연결되어있다는 믿음이 모든 것의 큰 차이를 가져올 것입니다.
My second stroy is about love and loss.
I was lucky. I found what I loved to do early in life. Woz and I started Apple in my parents’ garage when I was 20. We worked hard, and in 10 years Apple had grown from just the 2 of us in a garage into a 2 billion dollar company with over 4000 employees. We’d just released our finest creation – the Macintosh – a year earlier, and I had just turned 30.
나는 운이 좋았습니다. 나는 젊어서 내가 좋아하는 일을 찾았습니다. 내가 20살 때 우즈와 나는 부모님의 창고에서 애플을 세웠습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10년만에 우리 2명으로 시작한 애플은 1000면의 직원을 거느린 2십억 달러의 기업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막 최고의 창작품인 매킨토시를 그 1년 전 출시했고 막 30세에 접어들었습니다.
And then I got fired. How can you get fired from a company you started? Well, as Apple grew we hired someone who I thought was very talented to run the company with me, and for the first year or so things went well. But then our visions of the future began to diverge and eventually we had a falling out. When we did, our Board of Directors sided with him. And so at 30, I was out. And very publicly out. What had been the focus of my entire adult life was gone, and it was devastating.
그리고나서 전 해고당했습니다. 어떻게 여러분이 세운 회사에서 여러분이 해고당할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애플이 막 성정하면서 제 생각에 같이 회사를 경영하기에 아주 능력있었던 사람을 채용했고, 처음 일년동안은 그럭저럭 잘 해나갔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비젼이 갈라지자 이사회는 그의 편에 섰습니다. 그 때가 30이었고 나는 쫓겨났습니다. 그것도 아주 공공연하게. 내 젊은날의 전부였던 목표가 사라졌고, 아주 참담했습니다.
I really didn;t know what to do for a few months. I felt that I had let the previous generation of entrepreneurs down – that I had dropped the baton as it was being passed to me. I met with David Packard and Bob Noyce and tried to apologize for screwing up so badly. I was a very public failure, and I even thought about running away from the valley. But something slowly began to dawn on me: I still loved what I did. The turn of events at Apple had no changed that one bit. I had been rejected, but I was still in love. And so I decided to start over.
나는 몇 달간은 어떻게 해야할 지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나는 선배 기업인들이 내게 바톤을 넘겨주는 순간 떨어뜨리고 실망시켜버린 것 같았습니다. 나는 데이비드 팩카드와 밥 노이스를 만나서 내가 그렇게 악화시켜버린 상황에 대해 사과하려고 했습니다. 나는 말그대로 실패자였고, 심지어 영원히 실리콘벨리에서 추방된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무언가 서서히 나에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여전히 내가 했던 일을 사랑했습니다. 애플에서의 겪었던 우연곡절도 그 마음을 바꾸지는 못했습니다. 나는 추방되었지만, 아직도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다시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I didn’t see it then, but it turned out that getting fired from Apple was the best thing that could have ever happened to me. The heaviness of being successful was replaced by the lightness fo being a beginner again, less sure about everything. It freed me to enter one of the most creative periouds of my life.
당시에는 알지 못했습니다만, 그러나 애플에서 해고당했던 것은 내게 일어났던 일 중 최고로 좋은 일이었습니다. 성공의 중압감 대신에 초심자의 가벼운 마음으로 다시 시작함으로써 마음껏 자유를 만끽한 내 인생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기 중 하나였습니다.
During the next five years, I started a company named NeXT, another company named Pixar, and fell in love with an amazing woman who would become my wife. Pixar went on to create the world’s first computer-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is now the most successful animaiton studio in the world. In a remarkable turn of events, Apple bought NeXT, and I returned to Apple, and the technology we developed at NeXT is at the heart of Apple’s current renaissance. And Laurene and I have a wonderful family together.
다음 5년동안 나는 넥스트, 픽사라는 회사로 시작하고 제 아내가 되어준 놀라운 여성과 사랑에 빠졌습니다. 픽사는 세계 최초의 컴퓨터애니메이션 제작사로 토이스토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애니메이션 제작사가 되었습니다. 세기의 사건으로 기억되는 애플의 넥스트 인수로 나는 다시 애플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넥스트에서 발전시킨 기술들은 현재 애플 르네상스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렌과 저는 행복한 가족을 이루었습니다.
I’m pretty sure none of this would have happened if I han’t been fired from Apple. It was awful tasting medicine, but I guess the patient needed it. Sometimes life is going to hit you in the head with a brick. Don’t lose faith. I’m convinced that the only thing that kept me going was that I loved what I did. You’ve got to find what you love.
만일 애플사에서 해고당하지 않았더라면 이러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애플에서의 해고는 정말 지독한 맛이 나는 약이었지만 환자에게는 꼭 필요했던 약이었습니다. 때로는 인생이 당신의 뒷통수를 벽돌로 후려치더라도 소신을 잃지 마십시오. 내가 하는 일을 사랑한 것이 나를 계속나아갈 수 있도록 했다는 것을 나는 확신합니다. 여러분도 여러분이 사랑하는 일을 찾으십시오.
And that is as ture for your work as it is for your lovers. Your work is going to fill a large part of your life, and the only way to be truly satisfied is to do what you believe is great work. And the only way to do great work is to love what you do. If you haven’t found it yet, keep looking – and don’t settle. As with all matters of the heart, you’ll know when you find it. And like any great relationship, it just gets better and better as the years roll on. So keep looking – don’t settle.
사랑하는 사람들처럼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의 일은 인생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고 진실로 만족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여러분이 하는 일이 위대한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일을 할 수 있는 오직 한가지 방법은 여러분이 하는 일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만일 아직 사랑하는 일을 찾지 못했다면 계속 찾으십시오.- 그리고 주저앉지 마세요. 진심을 다하여 찾다보면 언젠가 사랑하는 일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위대한 관계들처럼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더 나아질 것입니다. 그러니 찾기를 계속하세요 – 안주하지 말고요.
My third story is about death
When I was 17, i read a quaote that went someting like If you live each day as if it was your last, someday you’ll most certainly be right. It made an impression on me, and since then for the past 33 years I ‘ve looked in the mirror every morning and asked myself If today were the last day of my life, would I want to do what I am about to do today? And whenever the answer has been “No” for too many days in a row, I know I need to change something.
나는 17살 때 다음과 같은 인용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만약 하루하루를 당신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산다면 언젠가는 당신이 옳은 날이 올 것이다. 이 글에 감명을 받은 저는 그 이후로 지난 33년간 매일 아침 거울 앞에서 나 자신에게 마치 오늘이 나의 마지막 날인 것처럼 질문해 봅니다. 만일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면 오늘 하려는 일을 계속 하고 싶은가? 그리고 아니오라는 질문이 계속된다면, 나는 다른 무엇인가로 바꿀 필요가있다는 것을 압니다.
Remembering that I’ll be dead soon is the most important tool I’ve ever encountered to help me make the big choices in life. Because almost everything all external expectations, all pride, all fear of embarrassment or failure these thing just fall away in the face of death, leaving only what is truely important. Remembering that you are going to die is the best way I know to avoid the trap of thingking you have something to lose. You are already naked. There is no reason not to follow your heart.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명심하는 것이야말로 제가 이제껏 살아오면소 인생의 큰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 준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외부의 기대, 온갖 자만심, 수치스러움이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들은 죽음 앞에서는 모두 밑으로 가라앉고 오직 진실로 중요한 것만이 남기때문입니다. 당신도 곧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명심하는 것이야말로 무엇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덫에서 벗어나는 최고의 방법입니다. 아무 것도 잃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당신의 마음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About a year ago I was diagnose with cancer. I had a scan at 7:30 in the morning, and it clearly showed a tumor on my pancreas. I didn’t ever know what a pancreas was. The doctor told me this was almost certainly a type of cancer that is incurable and that I should expect to live no longer than three to six months. My doctor advised me to go home and get my affairs in order, which is doctor’s code for prepare to die. it means to try and tell your kids everything you thought you’d have the next 10 years to tell them in just a few months. It means to make sure everything is buttoned up so that it will be as easy as possible for your family. It means to say your goodbyes.
일년 전 저는 암 진단을 받았습니다. 아침 7시반에 검사를 받았는데 췌장에 종양이 있다는 것이 밝혀졌습니다. 저는 그 때가지는 췌장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의사는 이 종양은 거의 확실히 치료가 불가능한 종류의 것이며 길어야 3개월에서 6개울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내게 말했습니다. 주치의는 집으로 돌아가 주변을 정리하라고 했습니다. 의사들 약어로 죽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리를 하라는 것은 나의 아이들에게 다음 십년동안 해줄 수 있는 것들을 몇 달만에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임종시 가족들이 덜 힘들게 모든 것을 정리하고 작별인사를 하라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I lived with that diagnosis all day. Later that evning I had biopsy, where they stuck an endoscope down my throat, through my stomach into my intestines, put a needle into my pancreas and got a few cells from the tumor. I was sedated, but my wife who was there told me that when they viewed the cells under a microscope the doctors started crying because it turned out to be a very rare form of pancreatic cancer that is curable with surgery. I had the surgery and thankfully I’m fine now.
저는 그 진단을 받는데 하루종일을 보냈습니다. 그 날 저녁 목밑으로 내시경을 구부려 위장을 지나 창자까지 넣어서 췌장에 바늘을 집어넣어 종양 조직을 조금 채취했습니다. 저는 마취상태였는데 거기 있었던 아내가 말하길 현미경으로 세포를 분석한 결과 치료가 가능한 아주 희귀한 췌장암이라서 의사들은 울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저는 수술을 바았고 감사하게도 지금은 괜찮습니다.
This was the closest I’ve been to facing death and I hope its the closest I get for a few more decades. Having lived through it, I can now say this to you with a bit more certainty than when death was a useful but purely intellectual concept.
그 때만큼 제가 죽음 가까이 가 본적은 없습니다. 또한 앞으로 수십년 살아가는동안 가장 가까이 가 본 마지막이길 바랍니다. 죽음에 가가이 가보니 죽음이 때로 유용하다는 것을 단지 머리 속으로만 알고 있을 때보다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No one wants to die. Even people who want to go to heaven don’t want to die to get there. And yet death is the destination we all share. No one has ever escaped it. And that is as it should be. Because Death is very likely the single best invention of Life. It’s life’s change agent. it clears out the old to make way for the new. Right now the new is you, but someday not too long from now you will gradually become the old and be cleared away. Sorry to be so dramatic, but it’s quite true.
아무도 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습니다. 심지어 천국에 가고싶다고 말하는 사람도 그곳에 가기위해 죽기를 바라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죽음은 우리 모두가 가야하는 종착지이고 삶이 만든 최고의 걸작품입니다. 죽음은 새로운 것이 낡은 것을 대체하도록 만들어줍니다. 바로 지금 새로움은 여러분입니다. 그러나 멀지않아 여러분은 점차로 낡은 것이 되고 사라질 것입니다. 너무 극적이라면 미안하지만 사실입니다.
Your time is imited, so don’t waste it living someone else’s life. Dont be trapped by dogma which is living with the results of other people’s thinking. Don’t let the noise of others opinions drown out your own inner voice And most important, have the courage to follow your heart and intuition. They somehow already know what you truly want to become. Everything else is secondary.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살면서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의 생각대로 사느라 자신의 삶을 가두지 마십시오. 시끄러운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당신 내면의 소리를 날려버리게 하지마세요.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의 마음과 직감을 따르는 용기를 가지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과 직감은 이미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나머지 것들은 다 부차적인 것이지요.
When I was young, there was an amazing publicaiton called THe Whole Earth Catalog which was one of the bibles of my generation. It was created by a fellow named Stewart Brand not far from here in Menlo Park, and he brought it to life with his poetic touch. This was in the late 60s, before pesonal computers and desktop publishing, so it was all made with typewriters, scissors, and Polaroid cameras. It was sort of like Goolgle in paperback from 35 years before Google came along. It was idealistic, overflowing with neat tools and great notions.
제가 어렸을 때, 우리 세대의 바이블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The Whole Earth Catalog라는 멋진 책이 있었습니다. 그 책은 여기서 멀지 않은 멘로 파크에서 사는 스튜어트 브랜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쓴 책이었는데 그의 시적인 감정을 불어넣은 책이었습니다. 퍼스널 컴퓨터나 전자 출판이 존재하기 전인 1960년대 후반에 쓰여진 책으로 타자기, 가위 폴라노이드 카메라로 만들어진 책이었습니다. 구글이 출현하기 전인 35년 전 책으로 된 구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책은 아주 멋진 도구와 위대한 생각으로 가득찬 이상적인 것이었습니다.
Stewart and his team put out several issues of The Whole Earth Catalog, and then when it had run its course, they put out a final issue. It was the mid 1970s and I was your age. On the back cover of their final issue was a photograph of an early morning country road, the kind you might find yourself hitchhiking on if you were so adventurous. Beneath it were the words: “Stay Hungry. Stay Foolish” It was their farewell message as they signed off. Stay Hungry. Stay Foolish. And I’ve always wished that for myself. and now as you graduate to begin new I wish that for you. Stay hungry stay foolish. Thank you all very much.
스튜어트와 그의 팀은 The Whole Earth Catalog의 여러 차례에 걸쳐 개정판을 내놓은 후 최정판을 내 놓았습니다. 그 때는 1970년 중반으로 내가 여러분의 나이였을 때였습니다. 최종판의 뒤쪽 커버에는 이른 아침 시골길 사진이 있었는데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히치 하이킹을 하고 싶은 그런 길이었지요. 그 사진 밑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었습니다. 늘 배고파라, 늘 어리석어라. 그리고 저는 항상 그렇게 살기를 원했으며 이제는 새로운 시작을 위해 졸업하는 여러분도 그렇게 살기를 바랍니다. 늘 배고프라. 늘 어리석어라.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