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리더십

골똘한 사색으로 事物의 본질을 잡아내는 사람

『내 자신이 수십 번 변해 왔다. 하나씩 하나씩 노력을 하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요는 꾸준하게 변해야 한다. 끝없이 변해야 한다. 매일매일 조금씩 변해야 한다. 뒤돌아보면 절대 안 된다. 자기 자신과 약속해야 하고, 자기 자신에게 맹세해야 하고, 자기 스스로 변해야 한다. 절대 남이 바꿔 주지 않는다』

李 健 熙
1942년 경남 의령 출생. 1965년 일본 와세다大 졸업. 2000년 서울大 명예경영학 박사, 1966년 동양방송 입사. 1968년 동양방송·중앙일보 이사. 1987년부터 삼성그룹 회장으로 재직 중. 1996년 IOC 위원. 1998년부터 삼성전자 회장. 영국 파이낸셜뉴스 선정 「세계에서 가장 존경받는 기업인」에 한국인 최초로 선정, 저서로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

韓 昌 洙 삼성경제연구소 경영전략실 수석연구원

한국기업사의 신기록을 바꿔 온 李회장

2002년 年末(연말) 신라호텔에서 삼성 李健熙(이건희·1942~) 회장을 비롯한 그룹 사장단 및 구조조정본부의 핵심임원들이 송년만찬 모임을 가졌다. 2002년은 삼성이 稅前(세전)이익 15조원이라는 사상 초유의 기록적인 실적을 거둔 해여서 한껏 고양된 분위기였다. 삼성이 한국 기업의 頂上으로 우뚝 올라섰음은 물론 세계적 기업으로 도약한 한 해였다. 李회장이 승계한 지 15년 만에 삼성그룹을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완전히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 날 구조조정본부에서 15년 동안의 경영성과를 숫자로 제시했는데 매출액은 13조5000억원에서 137조원으로 10배, 稅前이익은 1900억원에서 15조1000억원으로 79배, 時價(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75조원으로 75배로 늘어났다. 삼성 全 계열사 중 적자를 낸 곳은 하나도 없었다. 이 정도의 경영성과 같으면 모두 흥분하고 자축할 만했다. 숫자 발표가 끝난 후 연말을 맞은 소회나 내년도 구상 같은 것을 1~2분 정도 짤막하게 밝히자는 제의가 나왔다. 자리가 자리인지라 자연 무거운 경영 이야기가 중심이 되었고 시간도 오래 걸렸다. 50여 명의 경영자들이 모두 한마디씩 하려니 시간은 어느새 두 시간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그동안 李健熙 회장은 미동도 않고 모든 참석자의 말을 들었다. 李회장의 스타일이다. 회의 때면 모든 참석자들에게 이야기를 시키고 듣기를 좋아한다. 중간에 말을 끊거나 중단시키지 않고 끝까지 듣는다. 그리고 마지막에 상당히 파격적 코멘트를 하거나 기발한 지시를 한다.

이 날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좋은 실적을 자랑하고 더 분발하겠다는 이야기를 했다. 李회장은 『이렇게 기록적인 실적을 올렸다는 이야기를 들을수록 나는 걱정이 된다. 삼성이 세계 초일류 회사가 되려면 아직 멀었는데 여러분들이 긴장을 풀거나 옛날의 나쁜 습관이 나올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또 15조원의 이익이 났다고 좋아들 하는데 거기 만족하지 말고 그 2, 3배의 이익을 내어 여러분들도 2, 3배의 보너스를 받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삼성아파트가 인기가 있다는 이야기에 대해서도 『일류 아파트가 되려면 내장재도 획기적으로 바꾸어 건강에 좋고 불에 안 타는 것을 써야 한다』고 지시했다. 原價가 좀 올라가겠지만 일류 아파트를 사는 사람은 값보다 건강을 더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세계 1위를 유지하는 모든 기업에는 예외 없이 「CEO(최고경영자)의 고뇌와 의지」가 담겨 있다. GE(제너럴 일렉트릭)의 전임 CEO인 잭 웰치는 1980년대 초반 거대한 공룡기업이었던 GE에 자신의 숨결을 불어넣어 GE가 마치 벤처기업처럼 유연하고 신속하게 움직이도록 만들었으며, 루 거스너는 재임 10년 만에 IBM이라는 코끼리가 「춤을 추도록」 조련하였다. GE에 웰치가 있었고 IBM에 거스너가 있었다면 삼성에는 李健熙가 있다. 그는 1988년 삼성의 회장에 취임한 이래 삼성을 유연하고 소프트한 조직으로 만드는 데 끊임없이 도전해 오고 있다.

李健熙 회장은 한국기업사의 신기록을 연달아 바꾸어 왔다. 취임 6년 만인 1994년 한국기업 최초로 兆(조) 단위의 이익을 실현했으며 2000년에는 全계열사 흑자에 힘입어 순이익 10조원을 돌파했고, 2002년에는 마침내 순이익 15조원의 벽을 넘어섰다. 현재 삼성에 속한 상장회사들의 時價총액은 현대, LG, SK를 모두 합한 규모와 비슷하다.

삼성에 대한 해외투자자들의 신뢰 또한 두터워 삼성전자를 비롯한 대부분의 계열사들에 대한 외국인 지분율이 매우 높다. 더욱이 2002년 4월에는 뉴욕 월街에서 삼성전자의 시장가치가 소니를 능가했다는 소식이 들려옴으로써 일본을 비롯한 全세계의 비즈니스 업계를 긴장시킨 바 있다.

30년 지켜본 임원, 『진면목의 20%도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가 이같은 업적을 달성하기까지 걸어온 길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그는 취임 5년째인 1993년에 「新經營(신경영)」을 주도하면서 그룹을 위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내놓겠다고 선언했고, 취임 10년째인 1998년에는 IMF 외환위기의 혹독한 시련 속에서 삼성의 생존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명과 재산은 물론 명예까지도 포기하겠다고 全임직원 앞에서 약속한 바 있다.

이러한 일들은 그가 그룹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배수진을 쳐야만 했던 저간의 사정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제 삼성은 IMF 외환위기를 성공적으로 넘기고 한국 기업으로선 믿어지지 않을 만큼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 성공의 한가운데에 李健熙라는 인물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李健熙라는 인물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이 점은 오랜 세월 그를 겪어 온 인물들도 마찬가지다. 창업주 湖巖 李秉喆(호암 이병철·1910~1987) 회장 시절부터 비서실에서 잔뼈가 굵은 李鶴洙(이학수) 구조조정본부장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先代(선대) 회장이 나를 찾으면 왜 찾는지, 뭘 물어볼 건지, 뭐 때문에 야단칠 건지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데 李健熙 회장이 나를 찾는다고 하면 왜 부르는 건지 감을 못 잡는다. 무슨 얘기를 꺼낼지 예측불허이기 때문이다』

삼성의 최고참 현역 경영인으로서 李秉喆 회장과 李健熙 회장 父子를 至近(지근)거리에서 보좌했던 삼성생명 李洙彬(이수빈) 회장조차도 『나는 李健熙 회장을 잘 모른다. 30년 넘게 지켜봤지만 진면목의 20%도 채 알지 못한다』고 말할 뿐이다. 그는 여느 대기업 총수처럼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지 않는다. 행사나 모임에도 좀체 모습을 드러내지 않거니와, 어쩌다 나온다 해도 무표정한 얼굴로 靜物(정물)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말도 어눌하고 독특한 제스처도 없다.

꿈의 청사진을 제시, 그것을 현실로 추진

李健熙 회장은 일등 기업을 계승해야 한다는 중압감 속에서 삼성의 후계자가 된 인물이다. 취임 초기부터 그는 세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삼성이라는 국내 제일의 기업을 물려받은 그에게 강한 호기심과 아울러 의구심도 있었다. 湖巖이라는 탁월한 선대가 있어 처신마저 쉽지 않았다. 매사에 湖巖과 비교되어야 하는 어려움을 피할 수 없었다. 본래 사람 만나는 것보다 혼자 생각에 잠기기를 즐겨 하는 李健熙에게 삼성 회장은 어울리지 않는 듯이 보였다. 빈틈없는 계획성과 합리주의로 다져진 삼성문화에 李회장은 다소 이질적이었던 것이다.

李회장은 기발한 발상을 했고 꿈이 많았다. 취임하자마자 李회장은 『그룹의 이익은 1조원, 임직원의 급여는 2~3배로 올려야 할 것 아니냐』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당시 그룹의 이익은 2000억원에 불과하여 1조원이라는 액수는 누구도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액수가 아니었다. 몽상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 몽상은 이내 현실이 되었다.

이익은 10조원을 훨씬 넘겼고 임직원들도 2~3배 이상의 대우를 받고 있다. 삼성 경영자 중엔 백만장자도 탄생했다. 비즈니스뿐만 아니라 다른 엉뚱한 꿈도 많이 현실화되었다. 환자 중심의 이상적인 병원을 만들려던 꿈은 삼성의료원을 통해 실현되었다. 삼성이 앞장서 우리나라의 병원 시스템이 완전히 바뀌었고 장례문화도 일신되었다. 또 삼성의 탁아소 사업도 李회장의 꿈이었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는 길은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일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그들이 낮에 안심하고 일 나갈 수 있게 애들을 봐주는 탁아소를 많이 만들어 줘야 한다』고 지시했을 때 처음엔 모두들 반신반의했다.

심지어 가난 구제는 나라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삼성이 어떻게 그걸 떠맡으려 하는가 하는 소리도 있었으나 李회장의 강력한 지시로 탁아소를 본격적으로 짓기 시작했고 지금은 모범적 성공사례로 평가되고 있다. 에버랜드나 미술관, 골프장 같은 것도 꿈 같은 청사진에서 시작되었으나 그 꿈은 현실로 구체화되고 있다.

승계 당시엔 삼성이 頂上급에 있었으나 不動(부동)의 1등은 아니었다. 오히려 불도저式으로 밀어붙이는 현대의 기세가 좋았다. 李회장은 국내 頂上이 아니라 세계적 수준의 일류기업을 목표로 했다. 그러면 국내 頂上은 저절로 된다는 전략을 구상한 것이다. 그 길만이 삼성家의 상속자로서 李健熙 회장이 자신을 입증할 수 있는 길이었다.

더욱이 세계가 급속히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고 있어 국내 1위의 의미는 점차 퇴색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세계 시장이 3, 4개의 다국적 기업들에 의해 과점화되는 시점에서 국내 1위라 할지라도 세계 랭킹에서 10위권 밖이면 살아남기 힘들다. 일찍이 이 점을 잘 알고 있었던 李健熙 회장은 승부수를 띄워야만 했다.

『세계적 기업 되려면 全부문이 변화해야』

그는 1993년 6월 소위 프랑크푸르트 선언을 통해 新경영운동을 시작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로 대표되는 新경영운동은 국내 1위의 삼성이 세계 1위로 나아가는 험난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그것은 창업 이래 삼성을 지배해 온 오랜 가치와 관행들을 철저히 부수고 새로운 조직으로 만드는 변화의 시작이었다. 성충이 나비가 되려면 껍질을 벗어야 하듯 삼성이 한 차원 도약하려면 창조적 파괴가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이후 삼성은 「무엇이라도 좋으니」 일단 변해 보자는 강력한 변화 드라이브에 휩싸인다. 李健熙 회장은 국내 기업이 세계 1위의 문턱을 넘어야 하는 어려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일반 제트기의 속력이 마하 0.9 정도로 음속의 조금 밑일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음속의 2배로 날려고 하면 엔진의 힘만 두 배가 되면 가능한가. 천만의 말씀이다. 비행기를 둘러싼 모든 자질, 소재가 다 바뀌어야 한다. 재료공학부터 기초 물리, 화학이 모두 동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일반 제트기에서 초음속 제트기로 넘어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국내 기업이 세계적 수준으로 도약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부분이 아닌 全부문의 철저한 변화가 수반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新경영을 통한 체질강화 작업을 시작한 지 불과 1년 후인 1994년 삼성은 1조7000억원의 순이익을 달성했고 다음해인 1995년에는 3조원대의 순이익을 실현함으로써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다. 순풍에 돛 단 격으로 자동차 사업에의 진입도 성공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1997년 말 몰아닥친 초유의 IMF 외환위기 사태는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국내 주가지수는 300선이 무너졌고 거리에는 실업자, 노숙자가 넘쳐 났다. 1997년 한 해에 모든 한국 기업은 엄청난 홍역을 치렀는데 이 와중에 삼성도 큰 손실을 입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IMF 외환위기는 삼성의 구조조정을 더욱 가속화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다른 어느 기업보다도 신속하게 구조조정을 완수한 삼성은 1998년부터 다시 흑자를 내기 시작하여 1999년 5조원, 2000년에는 10조원대의 이익을 실현하였던 것이다.

삼성이 1990년대에 수행한 양대 경영혁신인 新경영과 구조조정은 일견 그 출발점과 지향점이 달라 보이기도 하지만 한결같이 量的(양적) 경영을 청산하고 質的(질적) 도약을 통해 기업가치의 향상을 꾀한다는 점에서 일맥 상통한다. 무엇보다 삼성은 新경영을 통해 세계 1위가 되기 위한 방편으로 양이 아니라 질을 선택했다. 李健熙 회장의 다음과 같은 極言(극언)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내 말은 양과 질의 비중을 「5 대 5」나 「3 대 7」 정도로 가자는 것이 아니다. 아예 「0 대 10」으로 가자는 것이다. 질을 위해서라면 양을 희생시켜도 좋다. 제품과 서비스, 사람과 경영의 질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라면 공장이나 라인의 생산 자체를 중단해도 좋다는 말이다』

종래 量 일변도로 성장을 거듭해 오던 한국의 주력 제조업이 1990년대 중반 세계적 공급과잉의 벽에 부딪쳐 종내 IMF의 역풍을 받았던 점을 감안하면 「양보다 질」을 통해 세계 1위를 달성하고자 했던 新경영의 타이밍이 얼마나 적절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李秉喆·洪璡基로부터 경영수업 받아

李健熙 회장은 여러모로 湖巖과는 다른 스타일의 CEO이다. 湖巖은 시계추 같은 사람이었다. 출퇴근 시간은 칼같이 지켰으며, 해외에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목욕물 온도도 일정하고 골프를 치는 요일이나 티오프 시간도 정해진 스케줄대로 했다. 그러나 李健熙 회장은 이와 정반대의 생활 패턴을 보인다. 회사에 출근하는 시간은 물론 출근하는 날짜마저도 일정하지 않다. 알려지기로는 잠자리에 드는 시간이나 기상하는 시간도 매번 다르다. 며칠 밤을 새워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가 하면 24시간 이상 숙면에 빠지기도 한다.

湖巖과 李회장의 이러한 차이는 시대의 가치관과 경영관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湖巖은 규격화된 대량생산품을 만들어 내던 산업화 사회의 경영자답게 근면성과 시간엄수, 사고의 합리성과 정밀성을 중시했다. 반면 李회장은 지식경제 시대의 경영자로서 창의성과 다양성, 상상력과 집중력을 중시한다. 湖巖이 기강과 규율을 중시했다면 李회장은 유연성과 자율에 더욱 가치를 둔다.

李회장이 독자적 가치관을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湖巖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유년기와 소년기, 청년기를 보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지 모른다. 湖巖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그의 강력한 카리스마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湖巖의 3남 李健熙는 성장 기간의 대부분을 湖巖과 떨어져 지냈다. 그는 어릴 때 어머니 품을 떠나 고향인 경남 의령의 할머니 댁에서 세 살 때까지 자랐다.

이후 선친의 사업과 6·25 전쟁 등으로 인해 국내에서 초등학교를 다섯 차례나 옮겨 다닌 끝에 일본으로 건너갔고 일본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도 형과 자취생활을 했다. 이 기간에 李회장 남매가 부모와 함께 모인 자리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고 한다. 중학교 때 귀국해서 서울사대부고를 졸업한 뒤에는 다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와세다대학에서 공부했다. 그 후에는 미국으로 유학을 갔기 때문에 어린 시절과 젊은 시절을 통틀어 실제 湖巖의 그늘에 있었던 기간은 그리 길지 않다.

미국에서의 유학 기간을 마친 후 李健熙 회장은 비로소 湖巖의 직접적인 지도 아래 들어오게 되었다. 이 점만 놓고 본다면 李健熙 회장은 매우 행운아였다. 당대 최고의 기업가였던 李秉喆 삼성 회장을 아버지로, 행정과 언론계의 거물이었던 洪璡基(홍진기·1917~1986) 회장을 장인으로 모시면서 학습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洪璡基 회장은 湖巖의 평생 동반자로 법무부·내무부 장관을 지낸 후 1965년부터 타계할 때까지 중앙일보사를 이끌었다. 李회장은 洪씨의 장녀인 羅喜(나희)씨와 결혼, 장인과 사위로 인연을 맺었는데 洪회장은 湖巖과 더불어 李회장에게 최고의 스승이었다. 이 당시 자신이 받은 경영수업에 대해 李회장은 자신의 에세이집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선친은 경영일선에 항상 나를 동반하셨고 많은 일을 내게 직접 해보라고 주문하셨다. 하지만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는 않으셨다. 현장에 부딪치며 스스로 익히도록 하셨던 것이다. 이런 시간이 쌓이면서 「경영은 이론이 아닌 실제이며 感(감)이다」는 체험적 교훈을 배웠다. 한편 장인은 기업경영과 관련된 정치, 경제, 법률, 행정 등의 지식이 어떻게 서로 작용하며, 이 지식들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를 문답식으로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다. 결국 나는 두 분의 가르침을 통해 경영에 관한 이론과 실무를 동시에 배운 셈이다>

가르치기보다는 스스로 배우게 만든다

李健熙 회장이 받은 경영수업은 혹독한 것이었다. 湖巖은 점심시간에 계열사 사장들을 불러 업무를 보고받았는데, 이 자리에는 洪璡基 회장과 李회장이 고정 멤버로 배석했다. 1978년 부회장으로 승진한 후에는 湖巖의 스케줄에 맞춰 그림자처럼 수행했다. 엄격한 부친 앞에서 李회장은 혈기 넘치는 20代 중반부터 꼬박 20년 넘게 경영수업을 받았다. 수업은 회사업무가 끝나도 계속되었다.

당시 湖巖은 용인 한옥에서 기거했는데 李회장은 매일 용인에 가서 湖巖이 취침할 때까지 지키고 있다가 밤 10시 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한다. 당시 계열사 사장들은 『점심 때 두 시간만 불려 갔다 와도 오후에 일을 못할 만큼 무너져 내렸다』고 술회할 만큼 湖巖의 서슬은 서릿발 같았다. 하지만 덕분에 李회장은 전자, 중공업, 섬유, 금융, 서비스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의 비즈니스 사정은 물론, 사람을 꿰뚫어보는 안목을 길렀다고 한다.

李회장은 부회장 시절에도 수행원 없이 혼자 해외 출장을 잘 다녔다. 항공편 예약도 직접 했고, 공항과 회사를 오갈 때도 주로 택시를 이용했다. 「직접 부딪쳐 봐야 사람도 더 많이 만날 수 있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삼성 회장이 된 후 李회장은 그룹 회장, 사장들에게도 같은 경험을 요구했다. 한번은 회장, 사장들을 외국에 출장 보내면서 비행기, 호텔 예약을 직접 하고 공항에서 호텔까지 택시를 타고 가보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삼성 지사에 절대 出迎(출영) 나가거나 호텔 안내를 하지 말도록 엄한 지시를 내렸다. 삼성 회장, 사장들이 처음으로 비행기, 호텔 예약을 해보고 공항 택시나 버스를 타 보며 많은 것을 알고 느꼈다고 그 뒤 이야기하곤 했다.

李회장은 일일이 가르치기보다 스스로 배우게 한다. 정보화시대가 시작되자 李회장은 모든 삼성 사장들이 컴퓨터를 배우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1995년 여름 KAIST와 제휴하여 삼성본사 부근에 정보화 강의실을 만들어 놓고 목요일 오후는 모든 사장들이 그 쪽에 가서 강의를 듣도록 했다. 누구도 예외가 없었다. 사장들은 모두 거기 가서 정보화 공부를 하고 컴퓨터 사용법도 배웠다. 분위기 때문에 모두들 열심히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사장들은 정보화나 컴퓨터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갖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정보화의 중요성을 이해하게 되어 밑에서 정보화 관련 결재가 올라올 때 함부로 그어 버리는 일은 없었다. 바로 그 점을 李회장은 노린 것이다.

「말을 위한 말」을 하지 않는다

李회장의 말은 어눌하고 투박하게 들린다. 느릿한 말투에 사투리가 섞여 있고 문장은 길게 늘어진다. 終止形(종지형)이 불분명하고 때로 한참 뜸을 들이다 말을 계속 이어가기도 하여 말이 어디서 끝나는지를 알 수 없다. 기상천외한 사례가 도입되는가 하면 엄청난 속도감으로 비약을 거듭하기도 하여 처음 듣는 사람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다. 하지만 그의 말은 들을수록 묘미가 있다.

李健熙 회장의 말이 그 어눌함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까닭은 그가 침묵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말이란 일정한 침묵이 배경이 되어 주어야만 그 본래적 가치가 드러난다. 李회장은 「말을 위한 말」을 하는 일이 없다. 말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되면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입을 다문 채 산다. 李회장과 서울사대부고 동기생인 洪思德(홍사덕) 의원은 李회장의 침묵이 꽤 오래된 습성임을 알려주고 있다.

『학생시절 健熙는 늘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생각」이라기보다 「묵상」에 가까웠다. 그때도 지금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친구들이 말을 걸면 돌아오는 답은 「응」, 「아니」뿐이었다. 동작도 느릿느릿했고 한 번도 놀라는 것을 보지 못했다. 한마디로 그는 鼓(북) 같은 친구였다. 작게 두드리면 작게, 크게 두드리면 크게 울려오는 북. 그것은 묵상과 직관의 힘이었다』

사실 李健熙 회장은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1993년 삼성의 新경영을 주도할 당시 그는 로스앤젤레스, 프랑크푸르트, 후쿠오카 등지에서 평균 8시간 이상, 최장 16시간짜리 회의를 잇따라 주재하며 불과 3개월 남짓한 기간 동안 8500쪽(A4용지) 분량의 말을 일시에 쏟아 낸 인물이다.

李회장의 언어적 절제는 주로 성장시절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었고 혼자 생각에 빠져 있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나면서부터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돼서 성격이 내성적이 됐고, 친구도 없고, 술도 못 먹으니 혼자 있게 됐고, 그러니까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생각을 해도 아주 깊이 하게 됐다. 가장 감성이 민감한 때에 일본에 머물면서 민족차별, 분노,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걸 다 느꼈다』

언어적 절제에 관한 한 李健熙 회장은 湖巖으로부터 받은 교훈을 잊지 못한다.

『선친께선 제가 부회장이 되자마자 직접 붓으로 쓰신 「傾聽(경청)」이라는 글귀를 선물로 주시더군요. 그래서 그 후엔 회의할 때나 현장에 갈 때 가능하면 한마디도 말을 안 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李健熙는 말을 못한다」는 소문까지 돌았다고 합니다. 당시 제 짧은 생각에도 참으로 좋은 가르침인 것 같았어요. 그렇게 10년 가까이 지내는 동안 상대방의 처지를 헤아리고 생각하는 힘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李健熙 회장의 말은 매우 함축적이어서 한동안 지난 뒤에야 그 뜻이 다가오기 일쑤다. 희로애락도 평소엔 잘 드러내지 않는다. 그는 비록 관심을 기울이는 대상일지라도 드러나도록 살갑게 대하는 법이 없다. 연말 송년파티 같은 때 「일은 그렇게 잘해 놓고 왜 뒤에 숨어 있어. 이리 앞으로 나와 봐」 하는 식이다.

李健熙 회장은 언제나 없는 듯이 있지만 그의 존재는 사람들을 한없이 긴장시키기도 안심시키기도 한다. 경영에 임해서도 李회장은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히 챙긴다기보다는 「화두」 같은 숙제를 던진 뒤 기다린다. 때로 사장과 임원들은 이 화두를 풀지 못해 애를 태우기도 한다. 그러나 이들은 화두를 푸는 지루한 과정에서 李회장이 전달하려는 뜻이 그리 간단치 않음을 느끼곤 한다.

호기심에서 출발하는 本質에 대한 집착

李회장은 아는 것에 대해 욕심이 많은 사람이며 본능적으로 효율에 집착하는 사람이다. 그의 호기심은 아무도 못 말린다. 그의 서재에는 TV 세 대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이것으로 그는 방송 3社의 뉴스를 동시에 보기도 한다. 보더라도 면밀히 비교하며 본다. 때론 신문을 펼쳐 놓고 1면 상단 왼쪽부터 마지막 면 하단 오른쪽 구석까지 글자 하나하나를 빠짐없이 읽고 나서 관계자들에게 피드백해 주기도 한다. 그는 비디오를 보더라도 내용 이해가 좀 미진하다 싶으면 앉은 자리에서 수십 번을 되돌려 보며, 연속극을 볼 때도 몰입하는 타입이다.

인기 드라마의 특징을 정확히 집어 낼 수 있을 정도로 안방의 기류에 대해서도 잘 아는 그는 사장들에게 영화를 보더라도 그저 줄거리만 따라갈 것이 아니라 감독의 의도, 카메라의 각도, 연기자의 연기, 대사 등을 동시에 감상하도록 권한다. 그래야만 「맛」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서 유학하던 시절 1300여 편의 비디오를 보았다 한다. 그는 조지워싱턴 대학에서 MBA(Master of Business Administration: 경영관리학 석사)와 더불어 언론·방송학을 수학했으며, 실제 동양방송과 중앙일보에서만도 10년 넘는 세월을 보냈다. 영화와 방송에 대한 안목은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왕성한 호기심 탓에 李회장은 아는 게 참 많다. 李회장은 기계나 첨단기술에 비상한 관심을 보여 일류 전문가를 만나면 밤새워 토론하기도 한다. 자동차나 전자제품 같은 것을 모두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하기도 한다. 그런 일을 진심으로 즐긴다. 그는 일본 역사에도 아주 해박하다. 초등학교 때부터 일본에서 공부했고, 일본에서 대학을 나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마 삼성그룹 안에서 일본을 가장 잘 아는 사람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일본의 江戶(강호)시대 參勤交代(참근교대·さんきん こうたい)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지방 영주가 많은 수행원을 데리고 1년씩 교대로 東京으로 가곤 했다. 일본도 우리처럼 70% 이상이 산이므로 규슈 지방에서 100여 명을 도쿄에 데리고 가려면 도로, 다리, 여관, 음식 등 걸리는 게 얼마나 많았겠는가. 이것이 계속 발전되어 오늘날 호텔 경영에 써먹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호텔 하나만 보더라도 우리와는 이런 차이가 난다. 우리는 이런 기술을 전부 외국에서 사 와야 했었다』

李健熙 회장의 진면목은 항상 본질을 추구하는 데서 발견된다. 그는 항상 표면에 나타난 현상보다 이면에 있는 본질을 알고 싶어한다. 본질에 대한 李회장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말 한마디에서 잘 드러난다.

『지하철을 타더라도 그 운행원리를 이해하지 못하면 「타는」 것이 아니라 「태워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우리에게 사물의 껍데기를 보지 말고 본질을 보라고 주문한다. 그는 『TV를 다섯 번 이상 보고도 그 이면을 들여다볼 생각을 못 해 본 사람은 경영자라고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삼성이 자동차 사업을 시작할 때 자동차 회사 사장 이하 모든 직원이 자동차에 대해 꿰뚫어 볼 수 있도록 정비사 자격을 의무적으로 따게 했다.

삼성이 오늘날 세계적 기업으로 성장한 데는 반도체 사업이 결정적 기여를 했다. 본격적으로 반도체 사업을 시작한 것은 1980년대 들어서였지만 李회장은 그전부터 반도체에 깊은 관심을 갖고 1974년에 파산한 한국반도체주식회사를 인수케 한다. 그것이 삼성 반도체 사업의 씨앗이 되었다. 처음엔 모두들 반신반의했지만 사재를 털어서라도 인수하겠다는 강한 주장이 먹혀 들어갔다. 또 메모리 분야에서 삼성이 세계 1위가 된 데는 4메가D램을 개발할 때 위로 쌓아올리는 스태크 방식을 채택한 것이 결정적 계기가 됐다.

반도체를 만드는 데는 밑으로 파 들어가는 트렌치 방식과 스태크 방식 두 가지가 있는데 어느 쪽이 좋은지 결론이 나지 않아 선진업체들도 논쟁만 거듭했다. 그때 삼성 경영진과 기술자들도 결정을 못 내리고 있었다. 최종회의에서 李회장은 스태크 방식을 결단했고 그것이 적중했다. 나중에 李회장은 집을 지을 때 지하실을 파 들어가는 것보다 지상으로 짓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겠느냐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인간미·도덕성과 효율

李회장의 본질에 대한 집착은 사람을 대할 때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다움, 즉 인간미와 도덕성이라 생각한다. 인간미라 해도 각 사람이 생각하는 바가 모두 다를 텐데 李회장은 이것을 매우 알아듣기 쉽게 풀이한다.

『인간미가 무엇인가. 아무리 급하게 뛰어가다가도 옆 사람이 넘어지면 일으켜 주고 가는 것, 이런 것이 인간미가 아닌가』

이같은 인간미에 대해 李회장은 다음과 같이 의미를 부연한다.

『사람은 능력이 좀 떨어지더라도 인간미가 있어야 한다. 일이 좀 서툴고 둔해도 괜찮다. 경험이 없어서 실수를 하더라도 나는 결코 야단칠 생각이 없다. 하지만 사람이 인간미가 없으면 안 된다. 큰 이익을 낸다 해도 반갑지 않다. 이것은 나의 진심이다』

李회장은 인간미와 도덕성이 지켜지는 조직은 반드시 번영한다고 믿는다. 그에 따르면 인간미와 도덕성이 충만한 조직은 결코 적자를 낼 수 없다. 그래서 그는 한 사업부가 적자를 냈다는 사실 자체보다도 적자발생의 원인으로 작용한 인간미와 도덕성의 부족을 더욱 한탄한다.

『사업을 하다 실패를 해서 몇천억, 몇조원을 날려도 나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실제 사업을 하다 몇백억, 몇천억원 펑크가 났어도 「왜 잘못했느냐」 하는 소리를 내 평생에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만큼 공부가 됐다고 생각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만약에 부정한 짓이라면 100만원만 해도 주저 없이 내쫓는다』

조직 내부의 윤리에 관한 한 삼성은 한국 기업 중 최고의 명성을 유지해 왔다. 「삼성과의 거래에서는 부정이 통하지 않는다」, 「삼성에는 파벌이나 부정이 없다」는 말들이 그것이다. 사실은 이것이 삼성이 지닌 최대의 강점일지도 모른다. 우리 주변에서 CEO와 임직원의 부도덕성으로 인해 스스로 와해되는 기업이 얼마나 많은가. 한 기업이 도산하는 이유를 차근차근 물어 들어가면 종국에는 사람 때문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이같은 논리를 李健熙 회장은 누구라도 알아듣게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전자제품이나 중장비를 사 가는 사람은 그것이 재산목록에 들어가는 것 아닌가. 도덕성 없이 어떻게 배를 만들고, 아파트를 짓고, 환자를 돌볼 수 있겠는가. 도덕성을 갖추지 못한 기업에서 좋은 물건이 나올 리도 없지만 설령 좋은 물건이 나오더라도 반가울 것이 없다. 시간 문제일 뿐 언젠가는 망하기 때문이다』

李健熙 회장은 본질에 대한 이해를 통해 불필요한 낭비요인을 사전에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湖巖이 내세운 삼성의 3大 경영이념 중 하나인 합리주의를 철저히 효율로 승화시켰다. 그가 감정의 낭비를 경계하는 것이나 말을 극도로 아끼는 것도 따지고 보면 효율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때로 그가 보여 주는 대범한 스케일도 알고 보면 극도의 효율성을 기반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그는 본능적이라 할 만치 非효율적인 것을 싫어한다. 효율은 그의 생활의 일부로 그의 생각과 태도에 體化(체화)되어 있다. 그는 미사여구와 허장성세를 좋아하지 않는다. 하다못해 그는 집에 머무를 때도 습관처럼 방에서 화장실까지 이동하는 가장 효율적인 동선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곤 한다고 할 정도이다.

그는 효율극대화의 수단으로 회의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제대로 된 회의를 통해 임직원들은 수십 단계를 거쳐야 할 업무를 한순간에 해치울 수 있다.

『회장 초기 시절 1억원짜리 기계설비 하나 사는데 도장을 19개나 찍어야 발주가 나갔다. 그래서 관계된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꺼번에 토론하고 그 자리에서 도장을 다 받으라고 했다. 결재과정에 4∼6개월이 걸리면 이것은 경쟁에서 완전히 뒤진 것이며 이익이 날 수가 없다』

그는 IT(정보통신)기술이 아무리 진보하여도 사람과 사람이 직접 만나는 것은 여전히 중요한 일이라 여긴다. 직접 대면하여 시행하는 회의의 중요성에 대해 李회장은 『한자리에 모였으면 서류가 아니라 말, 얼굴표정, 손짓, 눈빛을 통해서 종합적인 아이디어가 나와야 한다. 사람의 눈과 귀, 둘 중에 하나만 놀아도 장님 아니면 귀머거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어서는 좋은 발상이 안 나온다. 눈과 귀와 피부의 감각을 입체화해야 상승 효과가 나온다』고 말한다.

『실수를 資産化』

李健熙 회장은 비교적 관대하다. 그는 사람에 대해 대체로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고 아랫사람이라고 해서 함부로 대하지 않는다. 그는 부하들이 저지르는 실수나 실패에 대해서도 동일한 실수를 반복한다든가 하는 비도덕성의 문제만 아니라면 그것을 적극적으로 資産化(자산화)하라고 말한다.

李회장은 「채찍」보다는 「당근」의 효과를 신뢰하는 경영자이다. 그는 임직원들에게 대우를 좋게 해 줄수록 회사의 성과가 좋아질 것으로 생각한다. 李회장은 젊은 시절에 이미 이러한 신념을 굳히고 있었다. 1976년 한여름에 李회장은 회사의 통근버스를 타고 전자 수원공장으로 출근한 적이 있었다. 그 버스 출근은 쾌적한 경험이 못 되었다. 사무실에 들어온 李회장은 『아침부터 이렇게 버스에 시달려 가면서 출근하는 사람들에게 과연 제대로 일할 의욕이 생기겠느냐』고 반문하면서 회사가 개인에게 베푸는 것이 없으면 결코 愛社心(애사심)은 생길 수 없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것이 다 품질로 가는 것이다. 기본도 갖추지 않고 품질이 좋기를 바라는가』라고 질책했다. 직원용 화장실을 둘러본 李회장은 더욱 강도 높게 간부들을 질책했다. 당시 직원용 화장실은 매우 열악한 상태였다. 李회장은 노여운 음성으로 소리쳤다.

『회사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배설의 욕구도 제대로 해결해 주지 못하는데 생산이 되겠으며 품질이 나오겠느냐. 이 사원들이 생산라인에 들어가서 그 분풀이를 어디다 할 것 같은가!』

新경영을 주도할 당시 李회장은 임직원들에게 끈덕지게 변화를 역설했는데 그것이 모두 자신의 솔선수범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新경영의 모토인 「나부터 변하자」에서 「나」란 다름아닌 李健熙 회장 자신을 지칭한 것이었다.

『내 자신이 수십 번 변해 왔다. 하나씩 하나씩 노력을 하면 그렇게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요는 꾸준하게 변해야 한다. 끝없이 변해야 한다. 매일매일 조금씩 변해야 한다. 뒤돌아보면 절대 안 된다. 자기 자신과 약속해야 하고, 자기 자신에게 맹세해야 하고, 자기 스스로 변해야 한다. 절대 남이 바꿔 주지 않는다』

이 당시 李회장은 변화를 위한 다양한 방안들을 세세하게 열거하였는데 그 내용이 놀라울 만큼 구체적이었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그는 자신이 열거한 모든 방안들을 자신이 먼저 실천해 보았던 것이다. 즉 그는 남에게 변하라고 말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실천했던 것이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자꾸 내 자신을 바꿔 보고 변화시켜 보고, 습관도 바꿔 보고 하던 버릇이 많았다. 한겨울에 러닝셔츠 한 장만 입고 다섯 시간씩 시내를 돌아다녀 보기도 했다. 그 당시 겨울은 요새 겨울보다 훨씬 더 추웠다』

스스로에 대한 李회장의 엄격함은 경영현장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李회장은 삼성이 진출한 사업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을 경우 스스로를 엄하게 자책하곤 한다. 1990년대 후반 그는 자신이 최종적으로 재가하였던 자동차 사업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몹시 힘들어했다. 때마침 도래한 IMF 사태로 삼성이 위기상황을 맞았다. 우여곡절을 거쳐 삼성자동차를 마침내 르노에 넘기게 되었으나 이 과정에서 빚어진 조 단위의 손실이 문제가 되었다. 그러자 李회장은 망설임 없이 그 부분을 떠맡았다. 李鶴洙 본부장은 그 순간을 이렇게 설명한다.

『당시 삼성 재무팀은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를 빅딜하면 우리 계열사들이 수조원대의 대우 부채를 떠안게 되므로 그럴 바에야 차라리 삼성자동차가 법정관리로 가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법정관리로 갈 경우 계열사들의 피해는 줄일 수 있겠지만 여론이 악화되고 책임론이 나올 분위기였다. 회장에게 그런 사정을 털어놨더니 회장은 「빅딜하면 삼성 전체가 흔들린다는 데 고민할 게 뭐 있나, 내가 갚겠다, 다른 방도가 없지 않느냐」고 했다. 그런 결정을 내리는 데 1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李회장은 삼성생명 주식 400만 주를 사재 출연하게 된다. 李회장은 자동차 사업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진 것이다.

『삼성을 위해서라면 목숨·재산·명예도 포기하겠다』

李健熙 회장은 스릴을 즐기고 生死(생사)를 넘나드는 모험을 마다 않는 드문 CEO다. 고교시절엔 스포츠 중에서도 레슬링을 했다. 속도광인 그는 젊은 시절 달리는 말 등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을 뻔했고, 40代엔 크게 자동차 사고를 당한 적이 있다. 일요일 골프장으로 운동을 가다 마주 오던 차와 정면 충돌해 차가 전파되다시피 하고 李회장도 크게 다쳤다. 李회장은 기적적으로 찌그러진 차에서 튕겨 나왔는데 그 후유증으로 오랜 기간 고생하기도 했다. 그래도 속도에 대한 李회장의 집착은 식지 않았다. 얼마 전까지도 독일에 출장을 가게 되면 현지에서 준비한 포르쉐를 몰고 속도제한이 없는 아우토반을 질주하곤 했다.

1999년 삼성과 李회장을 취재하러 내한했던 포춘誌의 미국인 기자는 용인 자동차경기장에서 李회장이 운전하는 경주용 자동차에 무심결에 동승했다가 코스를 완주한 후 거의 인사불성이 되어 내렸다. 그는 50代 후반의 李회장이 그처럼 차를 빨리 몰 줄은 상상도 못 했다고 한다.

이처럼 자신의 生死 문제에마저 대범한 태도를 보이는 李회장이지만 삼성이 관련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한마디로 삼성은 그의 모든 것이다. 오죽하면 삼성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과 재산, 그리고 명예마저도 포기하겠다는 것 아닌가.

그는 삼성 내에 조그마한 위기의 징후라도 드러나면 서둘러 대비책을 강구한다. 또 끊임없이 경고를 발하고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그가 新경영을 추진하던 1993년은 삼성을 비롯한 한국 기업으로선 그다지 위기를 느낄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예년과 비교하더라도 그런 대로 괜찮은 성적을 거둔 해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본능적으로 위기가 다가오는 소리를 들었고 이대로 가면 삼성의 앞날이 큰일이라는 것을 알았다.

1995년 北京(북경)에서 특파원들과의 간담회에서 우리나라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라는 말을 하여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때문에 정부와도 한동안 불편한 관계가 되었고 삼성의 비즈니스에도 여러 견제가 들어왔다. 그러나 2년 후 IMF 외환위기 사태가 닥치고서야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할 수 있게 됐다. 삼성이 구조조정을 본격화한 1998년에도 마찬가지였다. 비록 IMF 한파가 몰아치긴 했으나 삼성만이 특별히 위험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그해 신년사에서 자신은 이미 생명·재산·명예를 포함한 모든 것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다고 선언했다.

삼성에 대한 李회장의 애착은 때로 호황 속에서도 警報(경보)로 작동한다. 1995년은 삼성의 반도체 사업이 첫 열매를 거둔 해로 이 해에 삼성이 달성한 경영실적은 건국 이래 한국 기업이 달성한 모든 기록을 갈아치웠다. 바로 이 해에 李健熙 회장은 다른 곳도 아닌 반도체사업부에 비상사태에 대비한 시나리오를 준비하라고 주문했다. 지시를 받은 관계자들은 어리둥절해했으나 李회장의 우려는 그로부터 채 3년이 지나기 전에 IMF 외환위기라는 현실로 드러났다. 당시 반도체사업부에서 수립·시행한 모의훈련이 이후 삼성이 IMF 외환위기를 무난히 극복할 수 있는 저력으로 이어졌음은 물론이다. 이 모든 일들은 자신의 전력을 다해 삼성을 주시하고 그것을 위해 고뇌하는 인간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것들이다.

李회장은 삼성이야말로 한국을 대표할 만한 人材집단이라 여기는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삼성만큼은 국제무대에서 결코 패배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한국 최고의 人材집단이 패배한다면 한국 경제의 희망이 없어지는 셈이기 때문이다. 李회장은 바로 이 점을 두려워한다. 그는 자신이 언젠가 표현했듯이 『70~80%의 1류 人材들이 모인 삼성이 어떻게 1.5류, 2류밖에 안 되느냐』 하는 것에 대해 항상 의문을 품고 또 고민하는 인물이다. 그는 한국 경제의 최후의 보루로서 삼성은 끝까지 살아남아야 하며 다가올 무한경쟁에서 이기고 또 이겨야 한다고 믿는다.

항간에서는 李회장을 무척이나 신비로운 인물로 수식하곤 하지만 사실 그는 매우 합리적인 사람이다. 그는 입에 발린 말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이고 자신이 한 번 내뱉은 말은 좀처럼 부정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그가 지금과 같은 천문학적인 富를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은 그가 잔재주를 부릴 줄 모르는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막대한 富를 쌓으면 정치에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한국에도 섣불리 정치에 뛰어들었다가 큰 낭패를 본 예가 많다. 그러나 李회장은 정치에 대해선 전혀 관심을 안 보일 뿐 아니라 일정한 선을 긋고 산다. 선대 李秉喆 회장 이래 지켜온 삼성의 전통이다.

『프로 산악인도 高峰에 오를 때는 코피를 쏟는다』

李健熙 회장의 취임 이래 「삼성號」의 항해는 외형상 평온해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 이 기간은 좀더 강한 경쟁자들과의 社運(사운)을 건 투쟁으로 점철되어 있다. 湖巖이 이끌던 삼성이 국내 頂上의 기업들과 쟁투를 벌였던 반면, 李회장이 이끄는 삼성은 세계 頂上의 기업들과 싸우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80년대까지만 해도 세계 최강의 면모를 과시하던 일본의 전자업계가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잃어버린 10년(Lost Decade)」의 침체 속에 빠져들자 마침내 삼성에게도 기회가 왔다.

같은 기간 삼성은 新경영과 구조조정이라는 두 차례의 성공적인 경영혁신을 통해 단숨에 국내 頂上에서 세계 頂上급의 기업으로 발돋움하였다. 이 과정에서 李健熙 회장은 몇 차례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졌고 그것이 성공했다. 반도체 사업의 대담한 확장, 液晶(액정)사업의 공격적 경영, 통신사업의 도전 등이 바로 그것이다. 삼성의 운명이 걸린 승부수에 삼성인은 회장을 믿고 따랐고 결국은 승리했다. 자동차에선 좌절을 보았지만 그것을 자산삼아 전자와 금융에선 몇 배의 더 큰 성공을 거둔 것이다.

오늘날 삼성그룹이 구축한 경영체제는 미국식 경영과 일본식 경영의 장점을 고르게 조화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의 경영방식은 너무나 이질적이어서 양립될 수 없다는 종래의 통념을 뒤엎은 결과이다. 삼성 CEO그룹의 빠른 결단과 전략성은 미국식 경영의 장점이며 균질화된 현장인력의 조직충성심(Loyalty), 개선의지 등은 일본식 경영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장점이다. 이러한 조화가 가능하였던 것은 삼성이 내부에 다수의 우수인력을 보유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미국식 경영과 일본식 경영의 강약점을 두루 꿰고 있는 李健熙 회장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어느 사장단 모임에서 디지털 미디어를 담당하는 사장에게 『요즘 일본 경제가 어려우니 일본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는데 천만의 말씀이다. 디지털 전자제품은 아직 일본이 우리보다 앞서 있다. 기술 수준도 높고 제품도 잘 만든다. 반도체나 통신 같은 첨단제품은 미국이 앞섰는지 모르나 디지털 전자제품은 아직 일본이 우수하다. 삼성이 일본 제품을 좀더 연구하고 배워야 한다』고 단단히 경고를 주었다.

미국 박사 출신인 삼성전자 사장들에게는 친근한 미국에만 가지 말고 일본에 자주 가서 그 곳 경영자들도 만나고 연구소도 둘러보라고 구체적 지침을 내린다. 또 사장 혼자 일본만 가지 말고 스태프들도 데리고 유럽도 같이 둘러보아 그들도 그걸 실감하게 하라고까지 덧붙였다. 그 사장은 담당 스태프들과 함께 일본, 유럽을 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다. 李회장은 평소엔 자율적으로 하도록 맡기지만 비상시기엔 경보를 울리고 주요 고비 때는 꼭 나서서 필요한 지침을 주거나 조언을 하는 것이다.

현재 삼성은 막 세계 頂上의 언저리에 다다른 것으로 보인다. 그간 올라오는 길도 험난하였으나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것이 李회장의 생각이다.

『프로 산악인들도 에베레스트산 같은 高峰에 오를 때면 고산병으로 숨이 막히고 코피가 흐르는 고통을 겪지 않으면 안 되듯이 세계 일류의 자리는 그만큼 험난한 길을 요구한다』

그동안 삼성은 남의 발자취를 따라오는 것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나 세계 頂上의 기업으로 변신하려는 이 무렵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이제 스스로 길을 개척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기에 李健熙 회장은 아직 긴장을 풀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제대로 하지 못하면 국내 후발기업은 물론 조만간 중국 기업에게도 쫓기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일본 기업들도 예의주시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 기업들이 현재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하지만 오랜 관행 때문에 저러고 있는 것이지 죽기 아니면 살기로 한 회사에 20~30%만 구조조정해 버리면 모두 다 살아날 회사들이다. 일본의 기술력은 아직 우리보다 훨씬 낫다. 이것을 일본사람들이 모르느냐?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안 하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이제는 삼성전자를 강자로 보지 약자로 보고 누가 봐 준다거나 살살 빌면 한 번 용서해 준다거나, 이런 것이 안 통한다. 경쟁사들이 여기저기 덫을 파 놓고 기다리고 있다』

李健熙 회장은 과거보다는 미래를 중시하는 사람이다. 또 꿈과 상상력으로 충만한 현재를 산다. 삼성은 그의 꿈과 상상력을 가능케 하는 광장이고 그의 삶이 지향하는 목표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삼성의 임직원들을 동일한 이념을 향해 전진하는 同志(동지)로 인식한다.

『반도체 돈 좀 번다고 그게 다 내 돈인가』

얼마 전 미래의 생존 방안을 마련해 오라는 회장의 엄명을 받고 사장들은 저마다 유망하다고 생각되는 업종들을 열심히 찾아왔다. 그러나 정작 사장단이 모인 자리에서 李회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래를 대비하랬더니 하나같이 신규 사업목록을 들고 왔다. 그러나 내가 말한 것은 그런 뜻이 아니었다. 내가 미래를 대비하라는 말은 人材(인재)를 확보하라는 말이었다』

人材를 제일로 여긴다는 삼성의 전통에 부합하는 탁견이자 현재 삼성의 사장으로서 무엇을 최우선시해야 하는가를 재삼 환기시켰던 대목이었다.

李회장의 人材 욕심은 유별나다. 지금은 한 사람의 천재가 1만 명, 10만 명을 먹여 살리는 시대라면서 돈은 얼마든지 들어도 좋으니 인재를 데려오라고 당부한다. 특히 CEO들이 직접 밖으로 나가 人材를 데려오라면서 연말 사장들의 실적평가 때 人材 유치에 높은 점수를 주도록 제도화했다. 뿐만 아니라 社內(사내) 임직원들의 교육에도 파격적 발상을 하도록 독려하고 있다. 삼성의 지역전문가 제도는 李회장의 지시로 만들어진 것이고 최근 들어 중국의 중요성이 높아지자 社內 중국어 연수 인원을 일거에 10배로 늘리게 했다.

李회장은 남보다 앞서서 생각한다. 반도체 호황으로 주변이 들떠 있을 때 그는 자신과 삼성에게 쏠린 부러움의 시선들을 일축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반도체로 돈 좀 번다고 그게 다 내 돈인가. 내가 이처럼 여러분을 채근하는 것이 돈 좀더 벌어 보자고 하는 짓인가. 오해하지 말라. 돈이라면 지금도 많다. 이자의 이자만으로도 평생 쓰고도 남는다. 왜 내 마음을 몰라 주는가. 우리가 이처럼 애쓰는 것은 모두가 나라와 후손을 위함이다. 우리는 한없는 서러움을 조상에게 물려받았는데 후세에까지 똑같이 물려줄 수는 없지 않는가』라고 그는 자주 말한다.

우리 역사와 민족에 대한 신뢰

李회장의 낙관주의는 우리 역사와 민족성에 대한 강한 신뢰로 표현된다.

『이 지구상에 어떤 민족이 몇 년 만에 글자를 만들어서 지금까지 쓰고 있는가. 세종대왕 때 한글이 나오고 측우기를 만들었다. 천문우주학도 연구했다. 이것이 불과 500년도 안 된 얘기다. 지금도 세계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은 나라, 세계에서 인구당 박사학위 소지자가 가장 많은 나라가 바로 한국이다.

우리는 단일민족이고 종교적 배경이 비슷하며 법보다 도덕을 더 중시하는 민족이다. 신바람만 나면 하나 더하기 하나가 열이 되고 백이 되는 잠재적 에너지를 충분히 갖고 있다. 반도 민족으로서 대륙적 기질과 섬나라의 진취적 기질을 함께 갖추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민족이다』

李健熙 회장은 위대한 경영자만이 할 수 있는 큰 업적을 이루었다. 그럼에도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듯 자신의 서재에 칩거하며 며칠씩 깨어 있기와 며칠씩 잠들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그는 그 엄청난 성과에도 그리 만족스러워하지 않고 있다. 삼성의 경영이 자신이 생각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한 그의 불만은 계속될 것이다.

『이익을 몇 조씩, 아니 10조원 가까이 낸다는 회사 사장을 불러놓고 거꾸로 화를 내고 고함지르고 있는 것을 알면 외부 사람이 봐도 우스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느낌이 그렇지 않다. 오늘날 우리가 이룬 것은 우리의 실력도 일부분 있지만 대부분 선진기업들의 방심과 상당한 運(운)과 우리 선배들의 희생정신이 이룩한 결과이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 경영이란 숫자게임이 아니라 이러한 과정의 엄격성에 그 본질을 두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출처: 신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