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 나

가족과 나     
 
명절을 한번씩 치르고 나면 이른바 명절증후군을 겪는다며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져 가는것 같다. 주부들 특히 큰 며느리들은 명절이 다가오면 집안치울 걱정과 음식장만 걱정등으로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짜증이 나고 명절이 끝난뒤 뒷 처리를 하고나면 정신적 육체적 피로감 때문에 몸살을 앓는 것이 곧 명절증후군이다. 남자들도 먼 고향길을 갔다온 사람은 차 안에서의 시달림과 가족들 사이의 좋은 관계를 유지하느라 육체적 정신적으로 피곤 했다며 피로감을 호소하는데 여인들의 고통이야 오죽하랴. 그래도 이 경우는 서로 재미있게 놀고 헤어진 뒤, 아무리 힘들어도 명절은 있어야 한다며 다음 명절을 기다리는 집안의 경우이다.
  더더구나 명절을 통해 서로 만나 그동안 서운했던 점들을 서로 이해하고 이제 부터 잘 해 보자고 다짐한 경우는 몸은 힘들었어도 남들 보다 몇 십 배 보람을 느끼는 명절이었을 것이다.
  명절을 보내고 난 뒤 새로운 서운함을 느꼈거나 그때 까지의 서운함이 더욱 깊어진 경우는 많지 않겠지만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명절증후군이 더욱 오래 갈 것이다.
  나의 경우는 최근의 명절들이 어떤 명절 이었을까? 첫번째의 경우였다고는 자신있게 말 할 수 없다. 그동안 세태가 그 만큼 바뀐 탓인지 아니면 그동안 내가 다른 가족들에게 서운하게 대해왔고 이 서운함이 옛날까지 거슬러 올라가 더욱 깊어진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대화를 통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은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것은 서로 더욱 잘해보자는 의도에서 그동안 가슴속에 묻어둔 서운했던 점들을 노출 시키고 해소하려고 노력한 하나의 과정이었다고 생각하면서 뜻 있는 명절들 이었다고 자위해 본다. 또한 인생이란 이런 일들의 반복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본다.
   나는 최근 일련의 명절을 겪으면서 가족의 형성과정과 형제들이 자라서 결혼을 하고 독립해 가는 과정이 얼마나 큰 사회과정인지 뼈저리게 느꼈다. 특히 가족의 구성원으로 편입해 온 부인(며느리)들의 역할에 대해서.

   잠시 여기서 과거여행을 해보자.
내가 태어날 당시(1953년) 우리마을 사람들의 재산상태나 직업분포 등을 단순 비교했을때 그래도 남들보다 형편이 나았던 우리집은 아버지가 초등학교(얼마 전까지도 국민학교라고 불리웠다)교사였으며 숙부가 대학을 나와 공무원인 농촌지도사로 도청소재지 광주에서 일하고 계셨다. 나는 6남매 가운데 둘째로 태어났으며 위로 형, 아래로 여동생, 그리고 내리 남동생 둘,막내 여동생이 있다. 국민학교에 입학했을 때는 아버님이 우리 학교 선생님이셨고 1학년때는 우리반 담임이셨다. 당시의 교육여건이나 자녀 교육의 대체적인 방법은 능력껏 장남을 잘 가르치고 장남이 잘 되면 그때부터 동생들을 거느리는 그런 형태였다. 아버님 세대도 중등학교를 졸업한뒤 교사가 되신 아버님이 숙부를 대학까지 보내셨으니까. 고모들은 물론 국민학교로 끝이였고.
  나는 중학교에 다닐 당시만 하더라도 학교를 졸업하고 농삿일을 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중3 때는 내 멋대로 고등학교 진학 보충수업조차 받지 않았고 고등학교 전기 입학시험에 실패한 뒤 이 사실을 안 아버지로 부터 혼이 난 적이 있다.

내가 중학교 졸업이 끝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두 살 터울인 형이 국민학교 6학년때 숙부가 계신 광주로 유학을 갔고 나도 그 후 중학교 입학때는 먼저 전기 입학시험에서 고향의 군 소재지 중학교(고흥중)에 합격한 뒤 후기 입학시험은 광주에 있는 중학교에 지원해 합격했으나 결국은 고향의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물론 두 아들을 중학교때 부터 (형은 초등학교 6학년 때 부터이지만) 숙부께 맡기시는 것이
부담이되고 내가 후기 합격한 광주의 중학교가 고향의 군 소재지 중학교보다 실력이 뛰어난
학교가 아닌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중학교를 다녔고 중학교를 졸업한 뒤 주경야독(낮에는 농사를 짓고 밤에는 공부함)으로 기회를 보아서 공무원 시험을 볼 요량이었다. 그리고 아버님 어머니 께서는 항상 우리 형제들에게 경쟁을 시킬 요량으로 공부 잘하는 놈은 끝까지 공부를 시키겠지만 공부 못 하는 놈은 농사를 짓도록 하겠다고 입버릇 처럼 말씀 하셨고 나는 공부를 잘 하고 못 하고를 떠나 둘째인 내가 농사를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광주에 있는 상업고등학교에 진학했고 아버님께서는 형은 대학에 보내지만
둘째인 나는 은행원이 되어 스스로의 힘으로 야간대학 같은 곳을 다니기를 기대하셨다. 그래도 나는 감지덕지해서 열심히 노력했고, 아버님이 장남인 형에 대해 기대가 너무컸으므로 형이 아버님의 뜻대로 성공하기를 기대하며 형이 오로지 공부에만 힘쓰도록 뒷바라지를 했다. 뒷 바라지라 해야 뒤늦게 자취생활을 하면서(자취 생활 이전에는 차례로 숙부님 댁에 맡겨졌다) 밥 당번과 빨래 당번이 다 이지만 거의 모든일을 내가 도맡아 하다시피 했다.
이것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것이며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후 형이 대학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자 나도 형을 따라 서울로 올라왔고 나는 끝내 아버님의 뜻을 충족시켜 드리지못하고 뒤늦게 대학진학의 길로 들어서 아버님 어머니에게 경제적 부담만 가중시켜 드린꼴이 되었다.
  광주로 유학을 보내는 것도 어려운 처지에 장남과 차남을 서울까지 유학을 보내야 하는
아버님 어머님 으로서는 살림을 두 곳으로 단순화 시켜야 한다는 생각으로 우리의 뒤를 이어 동생들이 중학교를 마치는 대로 차례로 서울로 올려보내게 되니 부모님의 허리는 휘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님 께서는 한 번도 우리들에게 진학 문제등에 대해 당신 자신의 의견을 말씀하신적이 없었다. 누구나 말썽만 안피우고 무엇이든지 배우고, 할려고 하면 뒷 바라지만을 충실히 해 주셨다.
  그 결과 우리 6남매 모두가 우여곡절 끝에 4년제 정규대학을 졸업할 수 있었고 대학 졸업후 곧바로 하나같이 번듯한 직장을 갖게되고 차례로 모두 결혼해 분가와 출가로 독립된 가정을 꾸려가고 있으며 큰 조카는 벌써 대학생, 둘째 여 조카와 내 큰 딸도 내년이면 대학생이 될 만큼 잘 자라주고 있다.

  이렇게 우리 형제들을 교육시키고 독립된 가정으로 만든 이면에는 부모님의 무한한 사랑이 있었기에 가능했으며 서울에서 아버님 대신에 가장역할을 한 형과 형이 결혼 하기 전까지 학교를 다니면서 집안일을 도맡아 했던 바로 아래 여동생 그리고 신혼 초 부터 네 동생들 뒷 바라지를 하며 살림을 꾸려간 형수의 숨은 공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런대도 고생만 하시다 우리 모든 형제의 成家과정을 다 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신 아버님과 지금까지도 홀로 사시면서 자식들이 우애롭게 잘 살아달라고 기도를 하시는 어머님의 은혜는 어떻게 해야 갚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 말썽없이 잘 자라 나름대로 제 갈길을 가고 있는 우리 형제들에 대해 고향 마을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은 부러움과 질투심을 느낄정도이며 먼저 가신 아버님과 생존해 계신 어머님에 대해서도 누구나 부러워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잠시 과거여행을 떠났다 되돌아 온것은 오늘날의 현실을 직시하기 위함이요  각자 결혼을 한뒤 독립된 가정을 구성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제간의 공동체생활이 변하게되고 생활문화나 사고방식까지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새로운 가정문화에 적응하는 부인(며느리)들의 역할에 따라, 부인(며느리)의 의견을 수용하는 남편(아들)의 태도에 따라 형제간의 구심점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다.
외 아들을 키우던 어머니가 외 아들을 결혼시킨뒤 일시적으로 아들의 마음이 부인쪽으로 급속히 옮겨가고 있다고 느낀 나머지 실망하는것 처럼 말이다. 며느리의 생각이나 태도에 따라 (반대의 경우도 있지만) 고부간의 갈등을 최소화하고 친 자식 보다 더 귀여움을 받는가 하면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남편과도 갈라서는 경우를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자주 보고 있지 않는가?    
  형제들간의 구심점을 흐트러 뜨리느냐 더욱 굳게 만드느냐는 결국 부인(며느리)들의 역할에 달려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물론 중심을 잡아주는 남편(아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겠지만…..

  나는 최근 1-2년간 갑자기 우리 집(어머니를 중심으로 한 형제 중심의 종전 가족)에 한냉전선이 엄습해 남자 4형제들이 다소 소원해진 느낌을 갖게되고 형이 동생들에게 느낀 서운함의 강도는 둘째인 나에게 가장 강하고, 세째, 네째로 내려가며 차례대로 조금씩 낮아진 것 같은 감을 느끼고 있다.
형이 어머님에게 느끼는 서운함도 느껴진다. 과연 그 원인은 무엇일까?
먼저 어머님 한테는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것인지 모두가 자기들 나름대로 더 고민을 하고 그동안 소홀함이 없었는지 자신들을 되돌아보고 끊임없이 반성하고 있는 만큼 전체 형제 개개인들에게는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내 진단이 정확하다면 결국 형의 마음속에는 동생들에 대한 섭섭함이 기본적으로 깔려있고 이러한 섭섭함을 때때로 우회적으로 표현하는데도 어머님은 동생들을 두둔하는 듯한 발언을 해 어머님 한테 까지 섭섭함을 느끼게 되고 이것이 상당기간 누적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만약 한 지붕아래 어머님과 우리 형제들이 함께 살았다면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날 마다 얼굴을 마주치며 지내고 그때그때 마다 서로의 마음을 속속들이 헤아릴 수 있으니 전혀 이런 결과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섭섭한 점이 있어도 그때그때 해소 할 수도 있었을 테니까.

결국은 각자가 독립된 가정을 유지해 나가고 그 독립된 가정에는 전혀 다른 환경속에서
20년 이상을 살아오다 우리 가족 으로 합류한 부인들이 있고 자녀들이 자라고 각자의 사고 방식이나 인생관도 달라지고 옛날 한 지붕 아래서는 서로 터 놓고 이야기 할 수 있었던 하찮은 이야기들도 이제는 비록 형제간 이지만 혹시 오해 할까봐 말 하기를 꺼리는 그런  상황변화가 오늘날의 섭섭함으로 누적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각 가정의 부부싸움 가운데 서로가 상대방 가족의 흠집을 들춰 싸운 경우를 누구나 겪었을 것이다. 부부싸움 방지의 제 1조가 상대방 가족의 흠결을 이야기 하지 않는 것이다.
비록 부인 또는 남편 이지만 자기 부모님(부인은 시 부모, 남편은 친정부모)이나 친 형제( 시 형제, 친정 형제)를 욕하면 기분 좋을 사람은 없다. 그러나 때로는 부인이  형수 또는 계수 씨, 올캐를 흉보고, 남편이 큰 동서 또는 작은동서, 처남댁을  함께 흉보는 경우가 있으니 이 또한 무슨 심보인가?

  이때 중심을 잡아주어야 할 사람이 바로 남편이며 남편이 중심을 잡지 못하면 부인이 이를
대신해 주고 이해하는 아량을 보여 주어야 하니 부인(며느리)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
한 가정을 흥하게 하는것도 여자요 한 가정을 망하게 하는것도 여자이며 한 인간이 세 여자를 잘 만나면 성공한다고 했는데 첫째가 어머니요 둘째가 부인이요 세째가 며느리라고 하지 않았던가.  

  잠시 이야기가 빗나갔지만 나는 여기서 명절 증후군과 가족에 대해 나름대로 결론을 내릴까 한다. 시대가 변하면서 명절의 의미가 자꾸 퇴색 되어가고 서로가 서로의 간섭을 받지 않고  편하게 살아가려는 풍조와 핵 가족의 영향 때문에 충효보다는 개인의 생활이 더욱 강조 되어가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려 하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명절에 대한 느낌이 해를 거듭할 수록 달라짐을 느낄 수 있다. 어느 집 에선가는 호텔에서 차례를 지내고 비용을 분담하니 더욱 많은 가족들이 참석했다는 경험담을 이야기 했다. 우선 명절 증후군을 겪지 않은 큰 며느리가 반기고 그래서 장남은 부인과 싸울 가능성이 줄어들었고, 큰 집에 대한 마음의 부담이 줄어든 동생들과 작은 며느리들도 한결 마음이 편하고 애들도 더 즐겁게 놀 수 있었다고 이야기 한다. 몇해 전 까지만 하더라도 콘도미니엄이나 관광지 호텔 등에서 차례를 지내는 세태를 두고 모두가 비웃었으나 이제는 그냥 넘어가고 요즘에는 인터넷을 통해 맞춤 제사상을 들여오게 까지  되었다. 앞으로 또 어떻게 변화해 갈지 모른다.
  명절의 세태나 풍습은 해를 거듭 할수록 변하지만 명절이 주는 의미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가족의 중요함이다. 명절이 가족의 중요함을 일깨워 주는 그래서 오랜만의 만남을 통해 혹시 느슨해 질 지도 모르는 가족관계를 다시 이어주는 가교가 되었으면 한다.
( 注 : 이 글은 2001년 설날을 보낸뒤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