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을 끌어오는 사람. 돈을 밀어내는 사람

돈을 끌어오는 사람, 돈을 밀어내는 사람
Money Magnetism by J.Donald Walters

차례

1. 원칙

   부란 무엇인가 ? / 자신을 믿으라 / 얼마든지 요구하라 / 더 큰 존재와  하나가 되라 / 물질은 의식의 발현이다 / 풍요에는 한계가 없다 / 기꺼이  주는 자가 되라 / 풍요는 베푸는 자의 것이다 / 돈과 영적 성장은 적이 아니다.

2. 방법

   문제는 집중력이다 / 어떻게 집중력을 기를 것인가 / 잠재 의식의 벽을  넘어서 / 긍정적인 확신을 품으라 / 현실 속에서 이상을 추구하라.

1. 원칙
   돈을 끌어오는 법과 돈을 적절히 사용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진정한 욕구의 내용이 무엇인지, 즉 자신과 타인을 위한 최고선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부란 무엇인가 ?

흔히 ‘돈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한다. 확신하건대, 민간에서 이런 금언이 생겨난 이유는 수많은 사람들이 ‘돈이 모든 선의 원천’이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을 향해서든 지나친 기대를 품는 것은 우상 숭배와 같아서, 사람들은 자신이 의지하고 있는 그 대상이 결국 자신의 기도를 들어주지도 않고 기대를 채워주지도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위의 오래된 속담은 성 바울이 이야기한 것처럼 다음과 같은 의미로 읽혀야 하리라. “돈에 대한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이다.”

어쨌든, 다이너마이트가 악이 아닌 것처럼 돈 자체는 악이 아니다. 다이너마이트는 길을 닦는 데 건설적으로 사용될 수 있고, 건물을 무너뜨리는데 파괴적으로 사용될 수 있다. 흔히 돈이 악한 목적에 쓰이게 되는 것은 인간의 탐욕 때문이다.

한마디로 돈은 에너지의 흐름을 표현한다. 돈이 사랑의 대상이 되어 그 자체의 목적을 위해 축적되면 해악을 낳는다. 돈을 쌓아두면 에너지 흐름이 막히기 때문이다.

한 아이가 부모를 따라 산에 올라간다. 그리고 부모와 함께 계곡에서 시원한 물을 마신다. 그 신선한 맛이 너무 좋아 계곡의 물을 병에 담아서 집으로 가져온다. 그리곤 날마다 그 물을 한 모금씩 마신다, 언제까지나 그럴 수 있기를 바라면서. 그러나 불과 몇 주 지나지 않아 아이는 병에 남아 있는 물이 썩어 버린 사실을 알고 낙담한다.

돈을 ‘가둬놓으면’ 썩는다. 우리의 삶에 끊임없는 돈의 흐름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돈을 단순히 사물로 보지 말고 에너지의 표현으로, 궁극적으로 ‘나 자신의 에너지’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이 책의 제목에 함축되어 있는 개념은 다음과 같이 서로 긴밀한 관련이 있는 두 가지 원칙으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돈을 끌어오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는 돈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법에 대한 깊은 이해가 있어야 한다.

둘째, 돈을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돈이 단순히 물질적인 힘들을 유리하게 조작한다고 해서 굴러 들어오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돈벌기가 운수소관이라는 말은 절대 아니다. 돈은 우리가 스스로 자신에게 끌어오는 것이다. 뒤집어 말하면, 우리가 돈을 버는데 실패하는 이유는 본질적으로 우리 쪽에서,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의 잠재의식에서 돈을 밀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조차 실제로는 돈을 밀어내고 있을 수도 있다.

결국 이 두 가지 개념, 즉 돈을 끌어오는 법과 돈을 적절히 사용하는 법을 터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진정한 욕구의 내용이 무엇인지, 즉 자신과 타인을 위한 최고선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어떤 자원을 가졌든 낭비 끝에는 고갈이 온다는 것이 인생의 법칙이기 때문이다. 나무를 새로 심지 않고 무차별 벌목을 한 결과 황폐해진 숲이 얼마나 많은가. 땅힘을 생각하지 않고 무작정 농사를 지은 결과 생산력을 잃어버리고만 농토는 또 얼마나 많은가.

막대한 재산을 분별 있게 사용하지 못해 빈털터리로 전락한 은막의 스타들을 생각해보라.
부란 무엇인가 ? 사람들은 대부분 부를 자본, 저축, 수입, 부동산 등과 동의어로 여긴다. 그러나 세상에는 얼마 안 되는 돈으로 더 없이 행복하게 살았던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반대로 이런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다. 반대로 이런 사람들에 비해 몇 배의 돈을 벌면서도 근근이 살아가는 것 같은 사람들을 나는 여럿 보았다.

이상한 것은, 돈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세상의 물건을 더 많이 얻고, 더 많은 휴가를 즐기고, 남들이 더 많은 돈을 갖고도 결코 누리지 못하는 것들을 누리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 두 부류 중에 누가 진정으로 부유한 사람들인가 ? 결국 문제는 단순히 누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졌느냐가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얼마나 잘 사용하느냐 하는 것이다. 거슈원의 <포기와 베스 porgy and bess>에 나오는 “ 난 없는 것을 많이 가졌네, 나에게는 없는 것이 아주 많지” 하는 노래를 기억하는가?

요컨대, 사람은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부유해지거나 가난해진다. 부는 어떤 고정된 양으로 치환 될 수 없다. 마음이 부유한 사람이라면, 혹은 영혼이 부유한 사람이라면 아주 적은 물질적 소유만으로도 인생에서 완벽한 만족을 누릴 수 있다. 반대로 부의 기준을 물질적 부에만 두는 사람은 5천만 달러를 소유하고도 자신의 친구가 9천만 달러를 갖고 있다는 이유 하나로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1963년 내가 책을 쓰는데 전념하겠다고 결심했을 때, 다른 수입 없이 3개월 동안 한 달에 10달러로 살아야 했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 나는 내 인생의 그 기간을 극도의 궁핍과 고난의 시기가 아니라 만족스러운 도전과 모험의 시기로 추억하고 있다.

그 석 달 동안 나는 돈을 적게 들이고 사는 온갖 요령을 터득했다. 우선 자주개자리 씨앗을 사다가 싹을 튀워서 인디언식 차파티를 만들어 빵을 대신했다. 진짜 우유보다 훨씬 분유를 즐길 수 있도록 입맛을 길들였고, 한 그릇의 디저트를 즐기는 대신 한 입의 후식으로 만족할 수 있도록 나를 훈련시켰다.

동네 식료품점에서 특별 판매를 할 때마다 그 기회를 최대한 활용했다. 그리고 스플릿피 수푸같이 싸면서도 칼로리가 많은 음식을 장만해서 며칠씩은 버텼다. 당시 내가 가난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특별히 가난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물론 풍족했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것은 내가 진정으로 가난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여러 가지에 대해 별 아쉬움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가장 중요한 의미에서, 나는 ‘부유했다’고

4분의 1 에이커 밖에 안되는 척박한 땅을 행복한 마음으로 일구며 살았던 한 아메리카 인디언의 이야기가 있다. 하루는 이웃에 사는 부유한 남자가 이 사람을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땅 5 에이커를 주면서 농사를 더 지으라고 했다. 인디언의 대답은 이러했다. “자네 뜻은 고맙네만, 나에게 농사 지을 땅이 더 많았다면 노래할 시간이 어디 있었겠나 ?”

한편, 내가 아는 사람들 중에는 엄청나게 많은 돈을 갖고 있으면서도 결코 자신이 부유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내 친구 중에 인도의 유슈한 대학에서 교수를 하고 있는 학자가 있었다. 이 친구에게는 괜찮은 집도 있었고, 식구들은 잘 먹고 잘 입으면서 풍족하게 살았다. 그런데도 이 친구는 자신이 불행하다고 여겼다. 자신이 서양에서 보고 즐겼던 최신 텔레비전 같은 비싼 살림살이를 장만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그의 불만이었다. 어느 날 저녁이 친구가 울면서 “나는 가난해! 나는 가난해!” 하던 모습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부는 풍요의 `의식`이다. 가난은 결핍의 ‘의식’이다. ‘부와 가난은 모두 마음의 상태이다.’ 우리는 자신이 믿는 만큼 부유하거나 가난하다.

내가 이렇게 돈을 끌어오는 방법에 관한 책을 쓰고 있는 것은 독자들을 꾀어 그들의 돈을 내 주머니에 안전하게 모셔놓은 다음 결국 ‘돈 대신 자기박탈의 철학을 지니라’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이 세상에서 돈이 중요하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 저술가들에게는 책을 쓰는 동안 먹고 살 수 있는 돈이 필요하다. 사진가가 가장 좋은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비싼 렌즈가 필요하다. 어떤 식으로든 돈이 문제가 되지 않는 활동 분야는 없다. 또 나는 내가 한 달에 10달러의 돈으로 몇 년이고 살 수 있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핵심은, 행복의 척도를 정신적인 요소로 규정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부를 끌어오기 위해서’ 올바른 마음의 태도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 책의 목적은 돈을 끌어오는데 도움을 주는 것이다. 돈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 돈이 마음의 평화를 방해하는 짐이 아니라 진정한 의미의 기회로 가는 문이 되도록 해야 한다. 이 책의 또 한가지 목적은 돈을 현명하게 사용한다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최대치의 이익을 얻을 수 있도록 돈을 사용한다는 것을 뜻한다.

자신을 믿으라

예수가 가르침을 펼쳤던 본래의 목적은 인간 영혼의 구원이었다. 그러나 예수의 많은 가르침은 인간 생활의 평범한 차원에도 똑같이 적용될 수 있다. 진리란 우리가 어떠한 현실 차원에서 추구하느냐에 상관없이 진실성을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가르침을 보자.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마태복음 13:12) 얼핏보면 이 대목은 어떤 진리 차원에 적용하든지 매우 불공평한 가르침으로 들린다. 그러나 우리가 변덕스러운 운명이나 자신의 힘이 닿지 못하는 불확실한 은총이 풍요를 베풀어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풍요를 우리 스스로 끌어오는 어떤 것으로 생각한다면, 예수의 이 말 속에는 완전히 다른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수가 강조하는 것은 풍요의 추구에 있어서 ‘우리 자신의’ 책임이다. 즉 풍요는 우리가 자신에게 ‘끌어와야’ 하는 무엇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모든 종류의 풍요에 해당되는 말이다. 왜냐하면 성공 역시 풍요의 한 종류이기 때문이다. 정서적인 만족도 마찬가지다. 친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우리에게 끌어온다. 반대로 우리는 이런 것들을 밀어낼 수도 있다.

풍요의 의식이 풍요를 끌어온다. 이것은 너무나도 간단한 원리이며, 풍요의 원칙을 이 이상으로 설명해주는 말은 없다. 반대로, 가난의 의식이 가난을 끌어온다.

여러분은 ‘가난 의식’이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부정적인 태도에는 부정적인 힘이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인생에 대한 우리의 기대는 인생이 우리에게 가져다주게 되는 부나 가난을, 성공이나 실패를, 만족이나 실망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품고 있는 기대에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얼마나 집중 하느냐에 따라 그 영향력이 커지기도 하고 작아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인도의 위대한 영적 스승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가르침들 가운데 핵심은 “의지가 클수록 에너지의 흐름도 커진다.”는 금언이다. 에너지를 자신의 몸으로 끌어오는 것도 의지의 힘이고, 외부의 어떤 대상을 향해 내보내는 것도 의지의 힘이다. 우리가 인생에서 바라고 기대하는 모든 것은 우리가 그 대상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느냐에 따라 성패가 결정된다.

의지력이 빈약한 사람은 에너지 흐름도 약할 수 밖에 없다. 반대로 의지력이 강한 사람은 언제나 자신의 내부에 있는 에너지 창고를 찾아내 이곳으로부터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이끌어낸다.

자발적인 의지는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자발적인 의지가 샘솟지 않으면 아무리 충분한 휴식을 취하고 훌륭한 식이요법을 실천해도 에너지 공급은 끊기고 만다.

에너지야말로 마음과 몸을 연결하고 ‘신성한 의식’과 물질적 우주를 연결해주는 고리이다. 과학은 물질이 본질적으로 에너지임을 증명했다. 나아가 많은 선구적 현대물리학자들은 에너지가 의식의 발현이라는 믿음을 피력하고 있다. 이러한 이들의 신념은 ‘신성한 의지’가 우주적 에너지라는 매개를 통해 물질적 우주를 창도했다는 고대의 가르침들과 일맥상통하고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자신의 손을 행해 돌을 들라는 명령을 내릴 때, 우선 마음속으로 손이 돌을 들어올리는 장면을 생각한다. 그러고 나서 의지의 명령을 통해 손에 에너지를 보내고 그 에너지를 행해 돌을 들어올리는 지시를 내린다. 이와 같이 우주의 모든 사건은 에너지의 흐름과 함께 일어난다.

요가난다는 몸 안의 에너지 흐름을 자각하고 그에 대한 통제능력을 기를 수 있는 심신 양면의 수련 체계를 고안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이 수련법을 매일 실천해왔다. 그 결과 이 수련체계가 육체적으로 도움이 될 뿐 아니라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는 원칙들에 적용해고 더 없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런 수련 시스템이 아니더라도 우리는 소극적인 사람들이 자신의 통제범위를 넘어섰다고 여기는 사건들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갖출 수 있다. 올바른 마음자세가 에너지 흐름에 대해 지닌 영향력을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이런 힘을 발휘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에너지는 단순히 우리 몸의 근육을 통해 물질에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에너지는 우리의 육체 밖으로 ‘자기장’을 방사함으로써 무엇이든 우리가 삶에서 원하는 것을 끌어온다. 똑같은 원리로, 에너지는 우리가 부정적인 기대를 강하게 품었을 경우 우리가 원하지 않는 그 상황을 여지없이 끌어온다.

에너지를 전기에 비교할 수도 있다. 실제로 전기는 에너지의 한 형태이다.(요가난다는 전기는 대해 “에너지 세계에 존재하는 동물적 흐름”이라는 흥미로운 표현을 썼다.) 전기는 우리 몸을 흐르는 에너지와 본질적으로 똑같은 에너지이며, 다만 그 발현의 차원이 낮을 뿐이다. 전기는 물질적 우주를 창조한 고차원의 에너지가 특정한 형태로 구현된 것이다.

전기는 전선을 흘러가면서 자기장을 만들어낸다. 전기의 흐름이 강할수록 이 자기장의 힘도 커진다.
이와 유사하게,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나도록 의도를 품을 때마다, 혹은 어떤 사물이 우리에게 끌려오도록 의도를 품을 때마다, 그 생각이나 의지의 힘은 에너지를 방사한다. 이 에너지는 다시 자기장을 만들어 내는데, 바로 이 자기장의 힘이 우리가 바라는 대상을 끌어오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돈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우리가 우주의 풍요 중에서 나의 정당한 몫에 대한 권리를 지니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실제로 우리는 그런 권리를 갖고 있다.

우주를 향해 수동적으로 요구하지 말라. 행운이 자신에게 미소짓기를 기다리지 말라. 자시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지나라. 자신이 전체 우주의 필수불가결한 일부분임을 알라.
자신이 이미 풍요 속에서 살고 있다는 의식을 가져라. 그러면 예수가 말한대로 당신은 더 많은 풍요를 끌어올 수 있다.

얼마든지 요구하라

죽어서 하늘나라에 간 남자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던 성 베드로를 따라 ‘천국의 폐품 창고’로 갔다.
성 베드로가 설명했다.

“여기서 그대가 보게 될 것은 하늘에서 내려주었지만 지상의 사람들이 거절한 선물들이오.”
“ 아니, 어떻게 그럴 수가 ! ” 남자가 소리쳤다. “저렇게 좋은 물건들을…. 저 캐딜락을 보십시오. 누가 저런 선물을 거절하겠습니까?”
“흠…. 그대가 하필 저 차를 지목했다는 사실이 흥미롭군요.” 성베드로가 대꾸했다.  “공교롭게도, 저 캐딜락을 거절한 사람은 바로 당신이오.”

“그럴 리가 !!” 사내가 소리쳤다. “저는 저렇게 멋진 선물을 거절한 적이 없습니다.!” “어쨌든 거절한 건 당신이오. 보다시피 저 캐딜락은 언제든 그대에게 넘겨지기 위해 저곳에 대기하고 있었소. 허나 그대는 차를 달라고 기도할 때마다 늘 머릿속에 조그만 폴크스바겐을 그리곤 했소.”

필자가 아는 한, 관념을 현실로 만드는 법을 가르치는 모든 책은 자신이 원하는 사물을 정확한 모습을, 즉 그 크기와 모양을 머릿속에 명확히 떠올리는 일리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자동차를 원하는가? 그러면 자신이 원하는 차의 정확한 모델을, 그 색상과 모양을 눈앞에 그려라. 그 차가 자신의 차고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라. 시동장치가 열쇠에 꽂혀 있는 모습을 상상하라.

앞의 이야기의 핵심은, 인생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두고 있는 모든 기회를 미리 예상하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특정한 사물을 요구함으로써 우리는 본의 아니게 또 다른 기회를 놓쳐버릴 수도 있다.

앞에서 나는 돈을 에너지의 흐름이라고 했다. 관념의 흐름이든 행동의 흐름이든, 모든 종류의 흐름은 경직성과 양립할 수 없다. 독단적 사고는 부서지기 쉽다.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리라는 판단은 모든 것이 예견된 대로 펼쳐지는 한 쓸모가 있다. 그러나 예기치 못한 도전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의 판단은 여지없이 배반당한다. 오른쪽으로 급회전해야 할 스키어가 자신이 이미 왼쪽으로 회전해버린 사실을 알게 되면 넘어지는 수 밖에 없다.

에너지의 흐름 속에 있는 사람은 고정된 지점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머리로 알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을 넘어서, 알려지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향한 끊임없는 운동에 대해 생각한다.

고정된 목표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 속으로 사라지는 목적지를 향한 끊임없는 전진과 확장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그 동안 살아오면서 이런 원칙을 활용해야 했던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어떤 물질적인 대상을 마음 속에 구체적으로 떠올리는데 이 원칙이 도움을 준 적은 거의 없었다. 내가 마음속에 떠올린 것은 구체적인 대상이 아니라 내가 움직여가야 할 ‘방향’이었다. 그 과정에서 명확한 시각적 상상력은 필수적이었지만, 그 대상을 지나치게 물질적인 테두리 안에 묶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나에게 자동차가 필요했을 때 내가 했던 일은 특정한 탈 것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를 통해 내가 누리게 될 혜택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상상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가 논의하고 있는 것은 비물질적인 원칙들이기 때문이다. 이 원칙들은 모든 물질은 결국 에너지라는 사실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나아가 에너지는 의식의 발현일 뿐이라는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나에게 특정한 액수의 돈이 필요했던 경우가 몇 번 있었다. 그럴 때에는 당연히 필요한 액수를 떠올렸다. 하지만 그럴 때에도 내 책상 위에 백 달러짜리 녹색 지폐가 무더기로 쌓여 있는 모습을 상상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나는 그 돈이 봉사해야 하는 특정한 목적을 머릿 속에 그렸다. 그리하여 돈이라는 개별적 실체에 집중하기보다는 그 돈을 포함한 에너지 흐름 전체에 집중했다.

한번은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집회를 개최한 적이 있었다. 집회를 주최한 사람들은 ‘중심가’지역을 미화하기 위해 모든 주민에게 가능한 액수의 돈을 약정해달라고 요청했다. 나무 심는 데 백 달러, 화단 조성에 25달러 등등 이런저런 사업에 기부금이 필요했다. 그 중에는 도로 개선 사업을 위해 2천 달러를 기부해달라는 요청도 있었다. 나는 이 금액을 보면서 그렇게 큰 금액을 약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만한 기부금을 감당할 만한 능력이 전혀 없었는데도 도로 개선 필요성을 절감한 나는 그 금액을 약정하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돈을 마련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나는 약정액을 써서 봉투에 넣고는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돈은 정확히 2주 후에 납부해야 했다. 일주일이 지나도 여전히 돈이 들어올 만한 구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나는 현관문 밑에 봉투가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안에는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한 친구가 보낸 편지가 들어 있었다. 편지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다. “며칠 전에 이 마을 다녀갔네. 우리 어머니께서 몇 달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동안 자네가 베풀어주었던 도움에 감사하는 마음에서 어머니의 이름으로 뭔가를 주고 싶었네.” 편지봉투 안에는 2천 달러짜리 수표가 동봉되어 있었다.

만일 이와 같이 일이 단 한 번뿐이라면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와 비슷한 일을 여러 차례 겪으면서 이런 종류의 사건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나는 우리의 삶에는 분명히 어떤 원칙이 작용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이 책에서 필자는 나 자신이 여러 해 동안 실험하고 증명해온 원칙들을 여러분에게 제공하고자 한다.

기대를 품을 때에는 유연한 마음자세를 지니라. 그러지 않으면 설사 기대가 실현되더라도 당신에게 끌러온 그것이 당신에게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이 아닐 수도 있고, 혹은 당신이 가질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못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대상이 아니라 방향을 향해 기대를 품으라. 고정된 목표를 생각하지 말라. 모든 것을 지향성 발전의 관점에서 생각하라.
그런 다음 앞장에서 이야기한 창조적 상상과 시각화에 에너지를 투입하라. 에너지는 우리가 고정되어 있는 특정한 목표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에너지 자체를 흐름으로 생각할 때 더 강력하게 흐르는 법이다.

더 큰 존재와 하나가 되라.

기타에서 줄을 벗겨내 두 막대 사이에 묶어서 퉁겨보면 빈약한 소리밖에 들리지 않는다. 기타가 풍부한 음량을 낼 수 있는 것은 줄의 진동을 증폭시켜주는 울림통 덕분이다.

똑같은 진실이 인간의 에고에도 적용된다. 인간을 드넓은 바다에 점점이 떠 있는 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인생에서 힘 얻는 것이 아니라 인생이 가해오는 위협을 받게 된다. 그리하여 자신이 대면하게 되는 고난의 언덕을 기를 쓰며 기어올라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되고, 거대한 난관에 부닥쳐서는 보잘 것 없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목이 쉬도록 소리치게 된다.

이런 사람들이 마흔쯤에 이르면 기력은 소진되고 심리적으로 탈진하고 에너지는 고갈되어 대부분 몸이 고장나게 되고, 미래의 성공이나 기회에 대해 냉소적인 사람이 되어 있기 십상이다. 이런 모든 현상은 이들이 자신의 에고를 인생과 우주의 광대함에 대한 자각과 결합시키지 못하고 집과 일이라는 두 점 사이에만 고정해놓았기 때문이다. 이들의 관심은 오르지 ‘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들은 존재의 위대한 모험 속에서 ‘나의 인생과 나눌 수 있는 것은 무엇이고 타인들과 나눌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하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 내가 인생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 하는 생각에만 빠져 있다.

자신의 관심사에만 사로잡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보다는, 타인을 자신의 관심사에 동참시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타인의 도움을 얻어낼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다. 타인을 자신의 관심사에 동참 시키는데에만 노력을 쏟는 사람보다는, 타인의 관심사에도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이 타인의 관심을 끌 가능성이 훨씬 높다. 자신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이기적인 관심의 견지에서만 사업에 접근하는 사람보다는, 높은 원칙과 이상에 호소하는 사람이 자신이나 타인의 마음속에는 헌신의 느낌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높다.

시야가 넓을수록 그 시야가 지닌 힘은 커지는 법이다.

나는 이 진리를 증명해주는 작은 사례를 몇 년전에 파리에서 경험한 적이 있다. 이 경우 ‘더 넓은 시야’라는 것은 하찮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사소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런 시야를 갖기가 더 쉬웠는지도 모른다.

그 날은 나의 생일이었다. 뭔가 특별한 방식으로 생일을 자축하고 싶었던 나는 신문에 난 음악회 기사를 보고 그 음악회에 참석하는 것으로 자축의 의미를 찾기로 했다. 그 날 저녁, 음악회가 열리기로 되어있는 교회에 도착한 나는 입장객을 통제하는 책임자가 50명 정도의 인파를 막아선 채 문을 닫고 있는 것을 보았다. 좌석이 다 찼다는 것이었다.

생일을 자축하려던 나의 계획이 보기 좋게 실패로 돌아갈 위험에 처해 있었다. 당황한 나는 책임자를 향해 소리쳤다. “오늘은 제 생일입니다!” 나의 호소는 누구에게나 해당될 수 있는 더 큰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그 호소를 접한 책임자가 되받아 외쳤다. “그러십니까? 들어오십시오. 선생님. 생일 축하드립니다. ! ”

이것은 사소한 예지만 자신의 좁은 목표에만 집중하고 있을 때에는 닫혀 있던 문이 더 큰 문제를 고려하는 순간 활짝 열리게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를 잘 보여준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부딪히는 문제들은 이보다 훨씬 복잡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러분은 에인랜드가 쓴 (수원 The Fountainbead)을 읽어보았는지 모르겠다. 이 작품에 표현된 철학은 일견 매력적으로 보인다. 한 인간이 확신에 찬 군중에 맞서 홀로 당당하게 서 있다. 하지만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이러한 철학은 작동하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자신의 이상에 충실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이 진리가 되기 위해서는 그 ‘이상’이 우리보다 더 큰 무엇이어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진리는 우리보다 훨씬 큰 무엇이다. 만일 우리의 전 존재가 진리라는 울림통 속에서 공명하고 있다면, 모든 사람이 나에게 반대해 일어서라도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것이다. 시간과 한계를 초월하는 진리의 광대함 앞에서는 전체 인류도 한낱 개미떼에 불과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고귀한 원칙에 따라 인생을 살다간 모든 위대한 인물은 깊은 차원에서 자신과 동조함으로써, 자신의 짧은 견해나 타인의 흥미와 타협하여 얻을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힘을 얻었다.

(수원)이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발언이 된 것은 주인공인 ‘용감한’ 건축가가 건축에 대한 자신의 ‘견해’라는 관점에서만 보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개인적 욕망과 만족이라는 관점에서만 생각한 것이다. 진리는 인식되어야 할 무엇이지, 결코 창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견해는 인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타인의 복지를 배제하는 욕망은 이기적이며, 그 시야는 좁을 수 밖에 없다.

에인 랜드의 철학은 자기중심주의의 차원을 결코 넘어서지 못하는 것이었다. 즉 그것은 “줏대 없이 타인의 견해나 욕망과 타협하는 것에 반대하여 단호하게 선언된 나의 견해와 욕망”이었다. 돈을 끌어오는 힘을 포함하여 모든 종류의 성공을 끌어오는 힘은 진리를 인지하는 능력과 정비례하며, 자신이 속한 더 큰 실재와 자신을 공명 시킬 수 있는 능력과 정비례한다.

물질은 의식의 발현이다

생물과 무생물 사이의 분리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견은 20세기의 위대한 과학적 성과 가운데 하나였다. 20세기 내내 주도권을 휘둘러온 물질주의자들은 이러한 발견을 통해 “물질이 궁극적 실재이며 의식은 물질적 요인들의 부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자신들의 가설이 증명되었다고 주장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정신은 신경회로 속을 움직이는 에너지 패턴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20세기 초반에 이루어진 또 하나의 발견은 이들의 철학을 근본에서부터 뒤흔들고 있다. 그것은 바로 ‘물질은 에너지의 발현’이라는 발견이었다. 이 발견에 따르면 물질주의자들의 신념을 떠받치고 있는 물질적 ‘ 실체’는 근거를 잃어버린다.

만일 실제로 물질과 의식이 하나라면, 그리고 물질 자체가 본질적으로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물질주의자들의 그것과는 없는 것이라면, 물질주의자들의 그것과는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즉 영구적인 실재는 물질이 아니라 의식이며, 물질은 의식의 발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리는 지금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의 상호연관을 다루고 있는 셈이다.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우리가 돈이나 성공이나 풍요를 끌어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투자하든, 다른 한편에서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무언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섬이 아니다.”했던 존 던 의 고전적인 경구에 아무런 이의를 품지 않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바다가 지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에는 선뜻 동의하기 힘들 것이다. 나아가 우주에 지성이 편재한다는 개념에 동의하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 지성이 ‘나’에게 개인적으로 특별한 관심을 쏟아준다는 생각은 쉽게 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의 경험은 “우주는 인간에게 응답한다.”는 경전의 가르침이 진리임을 말해준다.
진실은 이것이다. : 우리의 지성적 의식은 삼라만상의 배후에 존재하는 광대한 지성적 의식의 필수불가결한 일부이다. 우리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결코 영적 진공 같은 곳에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이 무한한 의식과 의식적으로 공명하면서 거기에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의 한정된 지성과 의지력으로는 불가능했던 많은 일이 현실로 일어난다. 우리는 모든 영감의 원천인 이 무한한 지성의 일부를 이루고 있으며, 이 지성은 우리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어떤 식으로 개입하고 있다.

우리는 자신의 목표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이루어질지 낱낱이 알아야 할 필요는 없다. ‘무한한 지성’ ( 신 ) 의 개입을 요청하는 마음자세만 되어 있다면, 세세한 사항에 대해서는 신경을 쓰지 않아야 우리가 바라는 일이 더 완벽하게 일어나게 된다. ‘무한한 지성’이 개입하고 있을 때에는 우리의 개인적 영향력이 닿지 못하는 다른 요인들이 작용을 하기 때문이다.

성자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보통사람들이 ‘기적’이라고 부르는 사건이 허다하다. 그러나 사실 기적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기적은 법칙이 작용하는 방식 일뿐이다. 사람들이 이런 사건을 ‘기적’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더 현묘한 차원의 자연법칙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무한한 지성’과 조화하며 살수록 우리가 바라는 일은 쉽게 일어난다. 반대로 이 위대한 ‘지성’과 떨어져 모든 일을 에고의 힘만으로 이루려고 하면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는 일을 일어나게 만드는 힘은 줄어든다.

이 진리는 우리에게 힘과 용기를 준다. 그러나 이 진리는 우리에게 확정된 의식 속에서 살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에고의 저항을 받기 쉽다. 에고는 우리의 육체나 개성을 ‘나’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흔히 쓰는 표현을 빌리자면, 이 장에는 좋은 소식도 들어있고 나쁜 소식도 들어있다. 물론 좋은 소식은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끌어올 수 있는 무한한 힘을 지녔다는 것이다. 나쁜 소식은 우리가 이기적인 바람을 품을수록 그 힘과 멀어진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이 움직일 수 있는 방향에는 두 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확장을 향한 것이고, 또 하나는 축소를 향한 우리의 잠재력에는 한계가 없다. 우리는 이미 무한 자체의 필수불가결한 일부이다. 반대로 축소를 향한 잠재력에도 한계가 없다. 안을 향해 수축하는 의식은 우리를 말 그대로 자멸하도록 만든다. 이기심, 속좁음, 비열함, 등은 우리를 철저한 의식부재, 정신적 무관심, 둔감함, 어리석음. 몰지각, 혼미함으로 몰고 간다. 무한은 바깥으로든 안으로든 한계가 없다. 우주에서는 궁극의 실재를 향해 한 없이 확장해 나아가는 일도 가능하고, 無限小(무한소)를 향해 한없이 축소해 들어가는 일도 가능하다. 인간의 의식은 일단 축소를 향해 방향을 잡으면 무의식을 향해 끝없이 위축될 수도 있다. 이 경우 의식이 얻지 못하는 것은 ‘완전한 무의식’뿐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의식은 우주의 유일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끊임없이 선택에 직면한다. 쉬운 선택도 있지만 어려운 선택도 많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무한을 향한 도전적인 부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과거의 습관에 사로잡혀 정신적인 도피책을 찾기도 한다. 그래서 술을 마시거나 해서 눈앞의 현실을 외면해버린다. 새장에 갇힌 새가 새장이 있어 안심하듯이, 우리는 이 작은 에고가 있으므로 안심한다. 자신의 욕망들을 채우기 위해 모든 원천으로부터(심지어 무한으로부터) 모든 것을 끌어오려고 하는 것이 에고의 본성이기에, 그 욕망들을 더 높은 차원의 우주 속에서 녹여낸다는 생각은 우리를 말할 수 없이 불안하게 만들다. 그래서 우리는 저항한다.

진실은 이것이다. : 우리가 진정으로 이 작은 책에 제시된 높은 진리들에 의거해 살고자 한다면, 이 진리들 앞에 우리를 바쳐 진리를 우리를 이용하도록 해야한다. 우리는 결코 그 진리들을 우리의 이기적인 목적에 이용할 수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이기심은 우주의 본성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에서 말한 ‘나쁜소식’은 정말 좋은 소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설사 우리가 자신을 축소시켜 확장된 우주와 단절시키더라도, 결국 에고에 대한 집착 속에서 자신에게 약속했던 성취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반대로 자기 정체성을 확장시켜나갈 때에만 에고의 차원에서까지 진정한 성취를 누릴 수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높은 법칙은 낮은 법칙을 포괄한다. 고대의 비의적인 가르침은 그것을 이렇게 표현했다.  “위와 같이 아래도 그러하다.” 예수도 말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태복음 6:33)

흔히 사람들은 “신을 위해 살라”는 말을 “인간적 성취를 포기하라”는 말로 듣는다. 그러나 이 말의 실제 뜻은 인간적 성취에 대한 ‘집착’을 포기하라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오르지 인간적 성취 뿐이라 하더라도, 그 성취를 끌어오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것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돈을 끌어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돈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이것은 중요한 법칙이다. 왜냐하면 인생의 모든 것은 수은 quicksilver 과 같아서, 잘 간수하지 않으면 순식간에 손에서 빠져 나가버리기 때문이다. 수은을 내 것을 만드는 방법은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다. 손을 꽉 쥐어서 붙잡으려 하지 말고 두 손을 한데 모아 펼쳐서 말이다. 집착에 사로잡힌 사람은 변화에 적응하는데 뻣뻣할 수 밖에 없다. 변화에 쉽게 순응하는 사람만이 새로운 사고방식에 대해 열려 있는 사람만이 파도를 타고 나아갈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파도가 부서질 때 함께 부서지고 만다.

인도에는 이런 속담이 있다. “올바른 행위가 있는 곳에 승리가 있다.” 높은 원칙들과 공명하며 살기 위해서는 그 원칙들을 자신의 목적을 위해 비틀 수 있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가장 높은 차원의 우주는 지성을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무한히 지혜로운 존재이다. 우주에 순응하라. 인간적인 이성으로 우주를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다. 우주를 속일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 속고 만다. 진리와 더불어 살라. 진리는 우리가 혼자 힘으로 얻어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훌륭한 것으로 우리에게 보답한다.

행복을 향한 열망을 품되, 그 열망 안에 타인의 행복까지 포괄하여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에게는 더 큰 번영의 기회가 찾아온다. 확장된 우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자신뿐 아니라 타인을 최고선을 추구하며 사는 것을 의미한다. 추상적인 차원에서 확장이라는 개념을 수용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확장된 의식의 대상에는 반드시 주변의 구체적인 현실이 포함되어야 한다. 즉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 나의 사업과 경쟁관계에 있는 업체들, 내가 아무런 인간적 유대를 느끼지 못하는 낯선 사람들, 동물들, 나의 욕망과 충돌하고 있는 타인의 욕망들까지 모두 포함되어야 한다.

  우주적 지성, 즉 신이 지닌 의식은 ‘당신을’ 인식하는 의식이며, ‘당신처럼’ 인식하는 의식이다. 우리는 이 의식을 향해 기도함으로써 응답과 안내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이 의식은 궁극적으로 우리 안의 ‘더 높은 자아’이기도 하다. 만일 ‘더 높은 자아’라는 개념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면 그것은 ‘최상의 잠재력’으로 생각하고 기도하는 행위를 자신 안에 있는 최상의 잠재력을 향해 다가가려는 노력으로 여겨도 좋다. 설사 우리가 그 존재를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의 더 높은 자아는 자신을 향해 다가가고자 하는 우리의 의도를 알고 있고, 우리 안에 있는 최상의 잠재력은 우리가 스스로 그 힘을 발견하기를 참을성 있게 기다리고 있다.

따라서 그 위대한 ‘실재’를 향해 우리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인도해달라고 요청하라. 파라한사 요가난다의 책(영원에서 온 미소 Whispers from Eternity)에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기도가 실려 있다.

“ 성스러운 아버지, 이것이 나의 기도입니다. : 무엇이든 영원히 소유하는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다만 제게 그날그날 필요한 것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는 힘’을 주소서”

풍요에는 한계가 없다.

여러분도 돈 많은 사람을 보면 그 부가 다른 사람들의 번영을 희생해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이렇게 생각한다.) 현대사회의 사고 속에 자리 잡은 한 가지 가정은, 돈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한 사람이 돈을 많이 가지면 다른 사람들은 적게 가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고 방식은 물질주의적 의식의 전형이다. 최근까지 인류는 이런 사고방식의 지배를 받아왔지만 이제는 서서히 그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고 있다. 물질을 궁극적인 실체로 믿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엄정한 한계 속의 세계에 살게 된다. 그리하여 에너지를 땅속에 묻혀 있는 석유의 양과 동일 시 하는 것처럼, 돈이든 기회이든 에너지든 모든 종류의 자원을 고정된 양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의식을 만물의 배후에 자리잡은 실체로 생각하는 사람은 양이라는 것 자체가 자신의 사고가 지닌 한계의 소산임을 깨닫게 된다.

실체로, 부는 우리가 창조하는 것이다. 부는 저만치 떨어진 곳에 가만히 존재하면서 우리가 주장해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무엇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가 돈을 끌어온다는 것은 사실의 전부가 아니다. 즉 우리가 끌어오는 것은 에너지이다. 그렇게 끌려온 에너지가 자신을 돈이라는 형태로 구현하는 것이다. 에너지라는 이름의 자원은 우주에 무한히 널려 있다. 부는 땅에서 산출되는 것도 아니고 공장에서 생산되는 것도 아니다. 부는 존재라는 우주의 땅에서 산출되며, 관념이라는 무한한 공장에서 생산된다.

흔히 부자가 되는 법을 가르치는 글들은 돈을 벌 때 화가가 작품을 창조할 때처럼 집중하라는 이야기를 한다. 다시 말해 돈 버는 일을 일종의 예술행위처럼 하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책에서 그런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부의 축적에 관한 이야기도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중요한 사실은, 비록 그런 이야기들이 실제로 부를 획득하고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는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멸을 초래하고 만다는 것이다.

한 가지 이유는. 앞에서 지적했듯이 부는 돈을 훨씬 뛰어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부는 행복이다. 부는 마음의 평화이다. 부는 충만한 인간관계가 가져다주는 풍요로움이다. 부는 단순하고 정돈된 삶이다. 부는 지혜이고 사랑이다. 돈의 추구에 지나치게 에너지를 쏟는 행위는 우리를 불결한 부자로 만들 뿐,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를 부유하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

또 한 가지 이유는, 돈을 과도하게 축적하면 돈을 에너지로 보는 의식이 무뎌져 돈을 일정한 양 안에 한정된 물질적 실체로 보게 되도 그리하여 언제든 불황이 닥치면 고갈과 도난과 상실의 위험에 노출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는 것은 자명한 진리이다. 사람들은 안심하기 위해 돈을 축적하지만, 바로 그 소유로 인해 불안해진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에게 필요한 만큼 끌어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지, 억만장자가 되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것이 아니다. 억만장자가 되는 데 들어가는 노력과 긴장은 전혀 가치가 없다. 어떤 문제에서든 중용을 지키지 못하면 자신의 의도와 정반대 되는 결과를 초래하기 십상이다.

돈을 축적한다는 의식을 갖고 있으면, 즉 돈을 취한 다음 그 돈이 자신을 통해 타인에게 흘러가지 못하도록 하면, 돈이라는 에너지들의 흐름은 방해를 받아 결국에는 완전히 정지해버린다. 샘물을 퍼내지 않으면 샘은 결국 막혀버린다. 우리가 자신의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사용하지 않으면 그 에너지의 흐름은 줄어들어 결국 사장되고 만다.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의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고 묻어두었다가 주인에게 책망을 들은 사내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을 때, 그가 의도한 가르침이 바로 이것이다. 예수의 이야기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윤리로 바꿔보면 이렇게 된다. : 내 안에 있는 에너지를 밖으로 흘려보내지 않고 자신만을 위해 모아두면 내 안 깊은 곳에 있는 신의 책망을 듣게 된다.

필자가 한번은 돈 많은 친척과 대화를 나누다가, 사람들이 자신의 돈을 자기만을 위해 쓰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내 이야기는 그 친척이 소유하고 있던 부를 염두를 둔 것이 전혀 아니었고, 단순히 신문에 실린 호화저택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우연히 나온 말이었다. 하지만 나는 곧바로 튀어나온 상대방의 반응에 놀랑 수 밖에 없었다.  글세, 그건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군!  생각이 정반대였던 두 사람은 상대의 사고방식에 대해 서로 놀랐다. 그 때 나는 영혼의 법칙과 세상의 법칙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여실히 느꼈다.

신으로부터 커다란 부라는 축복을 받고 있는 사람이 그 부를 오직 자신만을 위해 써버리면 얼마 안가 그 부는 줄어들거나 완전히 사라지게 되어 있다. 돈이든 이기든 재능이든, 우리가 이 세상에서 부여받은 모든 것은 봉사를 위한 기회이다. 우리는 단지 자신을 위해 살려고 이 세상에 온 것이 아니다. 인간에게 육체라는 선물이 주어진 이유는, 육체라는 선물이 주어진 이유는 육체를 통해 모든 생명에 대한 더 큰 자각 속으로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물질주의적인 사람들은 대개 물질 뿐 아니라 에너지도 한정된 양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진실은 이것이다. : 우리가 지닌 에너지를 많이 사용할수록 더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한다. 힘을 아껴야 해. 이 생각은 틀렸다.

물론 주기적인 휴식도 필요하다. 과로는 금물이다. 의욕을 잃을 정도까지 자신을 몰아가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의욕이 사라지면 에너지 공급도 차단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하라.  에너지는 기쁜 마음으로 의욕적으로 사용되면 결코 소진되지 않는다. 올바르게 사용된 에너지는 더 많은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돈을 벌고 싶다면 돈을 자신의 에너지 흐름을 만들어내는 중심점으로 여기라. 그리고 그 돈을 더 풍부한 에너지 흐름을 만들어내는데 사용하라 기억하라. 돈은 에너지의 상징일 뿐이다.  돈을 에너지로 여기라. 그리고 이 원칙을 기억하라.  의지가 강할수록 에너지의 흐름도 강해진다. 풍요의 흐름에는 어떤 한계도 있을 수 없다. 그 흐름을 방해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둘러친 집착이라는 이름의 담장뿐이다.

기꺼이 주는 자가 되라

필자가 아는 한 남자가 이혼을 할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아이들까지 딸린 터라 선뜻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던 이 남자에게 친구들이 한마디씩 했다. 그 요점은 대충 이러했다.  아들은 걱정하지 말게. 자신부터 생각해야지. 자네가 진정으로 이혼을 원한다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잊어버리게. 자네가 만족시켜야 할 사람은 바로 자넬세. 아이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걸세.  오늘날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 사람들에게 자아실현의 중요성을 계몽하는 수 많은 강좌, 세미나, 모임 등에서도 이런 주장을 흔히 접할 수 있다. 몇 년 전 미국에서 대중적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한 책에는 이런 제목이 달려 있었다.  자기이익 추구하기 

하지만 이런 가르침들은 모두 틀렸다. 이런 주장이 근본적으로 옳지 않은 이유는 명백하다. 인간의 의식을 타인을 향한 자애로 넓혀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체와 에고를 향해 좁아지도록 만드는 모든 것은, 길게 보면 반드시 우리에게 만족이 아니라 고통을 안겨주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 물질주의자들이 착각하는 것처럼 결코 소유를 늘리고자 하는 욕구가 생명의 본능이 아기 때문이며,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능은 자신의 정체성과 의식을(때에 따라서는 자신의 지배영역을) 확장하고자 하는 욕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새로운 것에 호기심을 품는 이유는 더 알고 싶기 때문이며, 라디오에 귀를 기울이는 이유는 세상의 다른 쪽에서 사람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기 때문이다. 생명의 가장 기본적인 충동은 밖을 향해 뻗어나가고자 하는 것이며, 이 충동을 거부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본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타인의 희생을 바탕으로 개인적 이득을 얻는 데서 잠시나마 어떤 기쁨을 맛볼지라도, 이런 종류의 기쁨은 결국 그 사람을 고통으로 이끌어간다.

모든 종류의 고통은 정체성과 자애와 의식의 위축을 낳는다. 반대로 이런 것들을 확장시키는 노든 것은 반드시 기쁨을 가져다준다.  그래서 예수는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큰 축복 이라고 했던 것이다. 행복이 곧 축복이라는 말이다. 주는 행위는 그 주체에게 행복을 안겨준다. 따라서 진정으로 성취와 만족을 원하는 사람이면, 진정으로 자기 이익을 추구하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이익 안에 타인의 이익을 포괄해야 한다.

따라서 돈을 버는 능력은 다른 모든 재능과 마찬가지로 신들을 위해 기꺼이 제공 되어야한다. 기억하라. 이 조언은 여러분 자신의 성취를 위한 것이다. 자신을 더 큰 실재와 동일 시 할 때, 우리는 높은 이상에 봉사하는 행위가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사장 큰 행복을 보장해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봉사를 굴욕이나 고통과 동격으로 여기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성취를 타인의 희생 위에 내 것 얻기라는 관점에서 보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으로 인한 고통을 자기 미덕의 증거로 여기고 있다. 한 여인이 남편과 아이들에게 열심히 안마를 해주고 난 후 자신의 몸에서 느껴지는 고통에서 어떤 위안을 얻는다면 정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인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한 것은 실제로 올바른 행위일 수도 있다. 그리고 여러분이 굳이 이 여인의 편을 들어서 사람은 고통을 무릅쓰고 라도 자신이 올바르다고 믿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말에도 동의하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극적으로 고통이 아니라 기쁨을 주는 것만이 미덕이 된다는 것은 여전히 진실이다. 죄는 궁극적으로 슬픔을 안겨준다. 우리는 축복 받은 존재이다. 우리가 가진 풍요를 더 많이 나눌수록, 더 많이 줄수록, 우리는 더 많은 봉사를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더 많은 축복을 누리게 된다.!

풍요는 베푸는 자의 것이다.

유대교와 기독교에는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온 십일조라는 매우 흥미로운 개념이 있다. 이 원칙이 가르치는 바는 이것이다.   신에게 뭔가를 바치는 행위에는 축복이 따르며, 우리는 신에게 자신을 바치는 만큼 축복을 받게 된다.

유명한 영능력자 에드거 케이시의 삶과 관련한 수 많은 이야기 중에서 흥미진진한 일화를 하나 소개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케이시에게 사람들의 전생을 알아내는 능력이 있었다고 믿고 있다. 그가 한번은 성공한 모델의 전생을 읽어낸 적이 있었다. 이 여인은 사진가들이 얼굴보다도 손을 찍는데 더 열심일 정도로 손이 아름다웠다. 트랜스(trance)상태에 들어간 케이시는 여인이 최근의 전생에 수녀였으며, 수많은 시간 동안 손과 무릎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이야기가 보여주는 진리는 우리 삶에서 직접 시험해볼 수 있다. 당신의 재능은 무엇인가? 어떤 재능이든 그것을 신게 바쳐보라. 자신의 재주가 천부의 재능과 거리가 멀어 보이더라도 아무 상관없다. 교회의 헌금통에 사과 한 알을 넣었던 가난한 소녀의 이야기를 기억하는가? 그리고 그 사과가 어떻게 황금으로 변했는지 기억하는가 ?

오래 전에 내 힘으로 사원을 건립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사원이 1 년 만에 화재로 전소되고 말았다. 누군가가 제단 위에 양초를 켜놓았다가 깜빡 잊고 끄지 않은 탓이었다. 이 자리에서 그 불행한 사건의 전말에 대해 길게 이야기할 생각은 없다. 다만 그 사건이 내가 연달아 찾아온 재정적 어려움을 간신히 이겨낸 취 한 달이 되지 않은 시점에 일어났다는 사실만 말해두고자 한다. 다시 말해 그 시기가 더 이상 나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어쨌든 나는 그 돌발적인 화재를 겪고 신에게 이렇게 기도했다.  나의 주인이시여, 이 사원은 제 것이 아니라 당신의 것이었습니다. 저는 사원을 지어서 당신께 그렸습니다. 저는 아무것도 잃지 않았습니다. 저에게는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커다란 기쁨이 솟구쳤다.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강렬한 기쁨이 몰려왔다. 나는 다시 기도했다.  나의 주인이시여, 사원 한 채를 잃은 일이 저에게 이토록 큰 기쁨을 가져다줄 수 있다면, 차라리 저의 전 재산을 다 가져가십시오.! 

그 날 저녁 나는 필요한 물건을 사러 동네가게에 들어갔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가게 주인이 놀라 소리쳤다.
 노래를 부르시다니! 몇 년 전에 우리 가게가 완전히 불타버렸을 때 저는 1년 동안이나 울었습니다.. 
내가 대꾸했다. 건물은 잃었지만 목소리는 잃지 않았거든요!
 
나는 마음 속에서 노래가 저절로 우러나오는 것을 느꼈다. 신이 내려준 기쁨이 너무 커서 다른 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이와 같이 신이 내려준 단 하나의 선물이 큰 선물이 크나큰 축복을 가져준다면,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현명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인도의 위대한 시인 라빈드라나트 타고르(Rabindranath Tagore)가 쓴 영감 넘치는 시를 한 편 소개한다.

골목길을 걸으며 집집마다 탁발을 하다 멀리서 당신의 황금 마차가 찬란한 꿈처럼 나타나는 것을 보고 만왕의 왕이 어떤 분일까 궁금했습니다.
나의 희망이 높아 날아오르면서 불행한 날들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동냥하지 않아도 적선물이 주어지고 도처에 널린 부가 저절로 주어지기를 기다리며 서 있었습니다.

마차가 내 앞에 멈추었습니다. 당신의 눈길이 나에게 떨어졌고, 당신은 미소를 지으며 내리셨습니다. 마침내 내 인생에 행운이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당신께서 나의 오른손을 잡으며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 무엇을 주겠느냐?”
아, 그 귀한 손을 거지에게 내밀어 구걸한다는 것은 얼마나 왕다운 장난이었는지! 나는 혼란스러워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서 있다가 천천히 바랑을 열어 마지막 남은 작은 옥수수 한 알을 꺼내 당신께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날의 끝에 바랑을 바닥에 쏟았을 때, 그 보잘것없는 무더기 사이에서 작디작은 황금 알갱이를 발견하게 된 나의 놀라움은 얼마나 컸던지요! 나는 통곡하면서, 제가 당신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는 가슴을 지니고 있었기를 바랐습니다.

알겠는가? 우리의 부를 신에게 바치는 것은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한 것이다. 하지만 신에게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따라서 아마도 여러분은 날마다 이 원칙이 여전히 작용하는지 조금씩 시험하면서 천천히 진행해나가야 할 것이다. 이것은 결코 빈정대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모두 한 배를 타고 있다. 진실은, 인간의 내밀한 욕망은 우리가 쉽게 가 닿지 못하는 잠재의식 안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어떤 알코올 중독자가 의식적으로는 술을 끊고 싶어할지 모르지만, 잠재의식은 그를 낡은 인습을 향해 계속 몰고 갈 수도 있다. 깊이 묻혀 있는 이런 뿌리들을 뽑아버리는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우리에게 완전한 성취를 맛보고자 하는 열망만 있다면 그 일은 여전히 가능하며(바람직하기도 하다), 실제로 ‘필연적’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원칙이 실제로 작동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모든 것을 신에게 바치면 신이 우리를 돌보아준다는 것을 여러 차례 절감했기 때문이다.
다시 화재 사건 이야기로 돌아간다. 그 사건은 나에게 영적으로 소득이 되기는 했지만, 물질적으로 보면 일간 손해가 분명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결국 물질적으로도 큰 도움이 되었다. 건물 한 채를 잃은 뒤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물질적 축복을 받았던 것이다.

필자가 여러 해 전에 겪은 일이다. 당시 나는 2년 동안 고생한 끝에 자가 수련 안내서인 (라자요가의 기법과 과학 The Art and Science of Raja Yoga) 저술 작업을 끝마친 참이었다. 나는 조용한 곳으로 나가 신과 함께 탈고를 축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신을 위한 프로젝트를 완수할 때마다, 특히 많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 일을 끝낼 때마다 거의 관행처럼 그런 자축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번에 찾아가기로 한 카멜이라는 켈리포니아 해안의 아름다운 바닷가 마을이었다.

그런데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사실이 있었다. 마침 8월이라 한창 여행시즌이었던 것이다. 카멜에 도착했지만 방을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한참 돌아다닌 끝에 한 군데 찾아내기는 했지만, 숙박비가 예상을 훨씬 초과했다. 그 돈을 내고 나면 집으로 돌아갈 돈이 모자랄 판이었다. 나는 망설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신이시여, 저는 당신과 함께 축하를 하기 위해 이곳에 왔습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교통혼잡과 소음을 무릅쓰고 가까운 몬테레이로 가서 모텔을 찾아봐야 할까요? 아니면 이런 불완전한 축하를 받아들여야 합니까? 신이시여, 저는 그냥 이 방을 얻겠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돈에 대해서는 당신께 맡기겠습니다.’ 그리고는 지갑을 꺼 내 방값을 지불하여고 했다. 그런데 나를 알고 있을 리가 만무한 접수계 직원이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그 해 여름 카멜을 거쳐간 여행자만 해도 수천 명은 될 터였다.

“돈은 안 내셔도 됩니다.”
나는 그 말을 퇴실할 때 정산하라는 이야기로 듣고, 숙박비를 미리 지불하고 싶어서 그런다고 했다. 그러나 체크아웃할 때 돈이 모자랄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은 내비치치 않았다.
“선생님께는 돈을 받지 않겠습니다.”
직원이 다시 설명했다.

“도대체 이유가 뭡니까?”
“숙박부에는 여행사 직원이 다녀간 것으로 기록해놓겠습니다.”
“그렇다면 고마운 일이오만, 대체 이유가 뭡니까?”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냥 선생님이 좋습니다.”

그 순간 나는 퍼뜩 깨달았다. 내가 그 축하를 신과 함께 나누고 있었기 때문에, 신 또한 그 축하를 나와 함께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이틑날 근처의 한 식당에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식사를 마치고 돈을 내려고 했더니 식당주인이 밥값을 한푼도 받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모텔이나 레스토랑에 갔다가 “돈은 안내셔도 됩니다.”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몇 번이나 되는가? 나는 이런 일이 나에게 몇 번 일어났는지 이야기 할 수 있다. ‘단 한 번’이다. 그 때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난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내가 의식적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의 축하다.”

신과 ‘함께’ 일을 하려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면 여러분은 한번 해보라. 그러면 신이 어떻게 여러분과 함께 일하는지 알고 놀랄 것이다.!

이 원칙을 체득할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 있다. 당신의 수입 중에서 일정 부분 통상(10퍼센트)을 신의 이름으로 뭔가 좋은 목적을 위해 기부하는 것이다. 기부를 하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이야기 할 것이다. “당장은 그럴 만한 능력이 없지만 나중에 능력이 ‘생겨서’ 기부를 할 수 있게 된다면 행복할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베푸는 행위 자체가 풍요를 만들어낸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이기심 없이 신에게 바치는 사람들은 결국 신이 자신들에게 보답해준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내보내는 모든 에너지는 우주를 떠받치고 있는 힘에 의해 더욱 강해져 우리에게 다시 흘러들어온다. 예수는 말했다.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마태복음 19:29) 스리 크리슈나도(바가바드기타)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확실히 알라 : ‘결단코’ 버림받지 않으리라.”

내가 하는 부부 한 쌍이 최근에 자신들이 나가고 있는 교회에 “저희는 정말로 십일조를 낼 능력이 없습니다.” 하는 내용의 편지를 쓰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은 자신들보다 가진 것이 훨씬 적은 신도들도 정기적으로 십일조를 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두 사람은 마음을 고쳐먹고 십일조를 내기 시작했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실직상태였던 여자가 직장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거의 같은 시기에 남자의 봉급도 올라갔다.

수입의 일정 부분을 신에게 바쳐보라. 그러면 모든 풍요의 원천인 신이 축복으로 보답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진정한 안정은 신에게서 온다. 우리가 이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한 우리의 인생길은 영원히 안개 속을 헤매고 있을 것이다. 신은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자들의 인생을 지극히 사소한 부분까지 살피고 배려한다.

돈과 영적 성장은 적이 아니다.

돈을 올바르게 사용하는 법을 터득한 사람은 여러 차원에서 소득을 얻게 된다. 풍요를 배가하고, 에너지는 강해지며, 기쁨은 켜진다.
여러 해 전에 흥미로운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중요한 프로젝트를 하나 떠맡게 되었다. 그러나 그 사업은 나의 이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이익을 위한 일이었다. 모든 사업이 그렇듯이, 내가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돈에 필요해졌다. 처음에는 프로젝트에 필요한 돈을 거의 나 혼자서 벌어야 했다. 나는 여러 도시를 돌며 강연도 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일을 했다. 당시 나는 난생 처음으로 돈 걱정에 시달리고 있었다. 내가 물질주의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늘 더 높은 영적 가치에 따라 인생을 살고자 노력해왔던 나로서는 정말이지 심각한 고민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이 프로젝트에서 얻은 진정한 소득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은 그 기나긴 갈등의 끄트머리에 이르러서였다. 그것은 물질적인 것을 훨씬 뛰어넘는 영적인 소득이었다. 그 때 내가 돈을 많이 번 것은 사실이다.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끌어들였던 빚을 모두 갚고도 남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나 개인에게 더욱 중요했던 것은, 도전을 피해가지 않고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과정에서, 그리고 그 일을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을 위해 수행하는 과정에서, 내가 내적으로 훨씬 더 강해지고 더욱 활기차졌으며, 장차 인생이 또 어떤 도전을 던져주든 충분히 헤쳐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나는 신과 더 가까워진 것을 느꼈다.

프로젝트에 필요한 돈을 버는 과장에서 돈을 버는 행위의 영적 측면에 대한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두 가지 가르침이 떠오른 것은 나에게 놀라움이었다. 그 가르침들은 나에게 커다란 확신이 되어 다가왔다. 그 중의 첫 번째는 요가난다가 한 제자에게 했던 약속이었다. 요가난다는 자신의 사역에 재정적으로 도움을 준 그 제자가 더욱 빠른 영적 진보를 이룩하게 될 것이라는 희망 어린 약속을 해주었다. 두 번째 가르침은 좀 더 일반적인 내용이었다. ‘신의 일에 봉사하기 위해 정직하고 근면하고 돈을 버는 행위는 신을 깨닫는 일 다음가는 위대한 기술이다.’  그 때까지 돈 버는 일을 지저분하기 그지없는 인생의 필요악처럼 여기고 있었던 나는, 돈이 필요한 현실적 상황을 하나의 위대한 영적 기회로 보게 되었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그 프로젝트를 떠맡아 진행하고 완수하는 과정에서 내가 얻은 가장 큰 소득은 영적 힘과 신념과 의지력이었고, 그 봉사의 행위가 가져다준 에너지였다.

흥미로운 사실은, 자신의 삶과 사업을 신에게 바치기로 결심한 사업가들이 급속한 영적 진보를 이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비록 그 목적이 이기적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사업가들은 자신의 에너지를 ‘사용’할 줄 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에너지를 명상과 영적 성장을 위해 사용하게 되면 엄청난 추진력이 생겨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돈 버는데 열심인 이들을 경멸하면서 단지 그 이유 하나로 자신이 더 ‘영적인 사업가’에 비해 영적 성장이 한참 더디게 마련이다.

영적인 성장에도 에너지가 필요하다. 명상과 같은 영적 수련은 결코 수동적인 행위가 아니다. 제대로 된 명상은 지극히 역동적이다. 제대로 된 명상은 지극히 역동적이다. 어떤 일을 하고 있든 완전한 자각 속에서 명상하는 사람은, 즉 깨어 있는 의식으로 불안을 잠재운 상태에서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모든 의식을 집중하는 사람은, 멍하니 앉아 ‘좋은’ 생각들을 떠올리기 위해 애쓰는 사람보다 훨씬 빨리 진보하게 된다.

따라서 무엇을 하든 당신의 모든 에너지를 그 일에 쏟으라. 행여 마음 한구석에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염려나 후회 같은 것을 품지 말라. 굳이 돈 버는데 신경 쓸 수도 있다. 하지만 이언 사람이 돈 버는 데 신경을 써야 하는 사람에 비해 반드시 더 나은 처지에 있다고는 할 수 없다.

얼마 전에 필자가 한 돈 많은 남자의 집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쉴새없이 일하면서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변명이라도 하듯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 밖에 있는 것은 나의 현실이 아닙니다. 내 생활은 집에 돌아와 명상실에 조용히 앉을 수 있을 때 시작됩니다.

짐작건대 내가 감동받기를 바라면서 하는 말 같았다. 그러나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됐군. 신과 함께 사는 시간으로 만들 수도 있는 시간들을 몽땅 허비하고 있으니.’

어떤 일을 하든지 그 일을 봉사를 위한 기회로 보라. 에너지를 창조적으로 활용하기 위한 기회로 보라. 모든 사람의 행복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로 보라. 우리 자비로운 의식을 넓힐 수 있는 기회로 보라. 우리의 의식을 ‘무한한 지성’과 공명케 할 수 있는 기회로 보라. 어떤 일을 하느냐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기억하라. 신은 돈이기도 하다. 신은 비즈니스 안에 있다. 산과 구름 속에, 사원과 교회에 신이 있듯이, 신은 은행에도 있다. 시장바닥에서 신의 모습을 보기란 쉽지 않다는 것을 필자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은 그곳에 있다. 지혜로운 눈으로 깊이 들여다 볼 수만 있다면, 우리가 어디 있든지 ‘틀림없이’ 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2.  방 법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이 세상에 열정없이 이루어진 일은 없다. 느낌이 강한 의지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열정이 흥분이라는 형태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야한다.

문제는 집중력이다.

지금까지 기본적인 원칙들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제 그 원칙들을 현실 속에서 구현할 수 있는 실질적인 방법에 대해 생각해보자.
첫 번째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집중’의 필요성이다.

앞에서 나는 우리가 하는 일의 성공여부가 그 일에 쏟아붓는 에너지의 양에 좌우된다고 말했었다. 또 의지력이 에너지의 방향을 결정한다고도 했다. 파라마한가 요가난다의 말대로 “의지가 강할수록 에너지의 흐름도 강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지의 힘을 기를 수 있을까 ?

첫 번째 조건은 집중이다. 집중은 퍼져 있는 빛을 한 줄기의 레이저 광선으로 모으는 것과 같다. ‘집중은 힘이다.’ 마음을 한군데로 모을 수 있는 사람만이 강력한 의지를 기를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의지력을 이야기할 때 인간의 정신력을 뇌의 기능에 한정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인간의 총체적 의식은 가슴의 느낌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의지의 힘은 우리가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해서 발휘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일이 일어나리라고 ‘생각한다’고 해서 발휘되는 것도 아니다.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규정을 따르자면, “의지는 성취를 향한 열망 더하기 에너지”이다. 가슴의 느낌이 따라주지 않는 한, 우리가 의도하는 것은 추상의 차원에서밖에 일어나지 않는다. 나아가 ‘강렬하게 집중된’ 느낌이 없는 한, 우리가 바라는 일은 그저 바람직한 생각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느낌이야말로 우리의 의도에 힘을 실어주는 의식의 한 측면이다. 한편, 느낌의 기능은 ‘고요하게’ 작동해야 한다. 불안해지거나 성급한 상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느낌이 불안정하게 요동하면 감정이 된다. 우리는 감정을 통해서도 힘이 생겨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감각은 순식간에 스쳐가는 환영 같은 것이어서, 잠시 존재했다가 다음 순간에 사라져버린다.

감정은 바다의 표면에서 일렁이는 파도와 같은 것이다. 파도가 아무리 거세도 바다 밑의 물을 움직이지는 못한다. 다시 말해 감정이 상황에 미치는 영향력은 전혀 지속성이 없다. 감정이 하는 일은 단지 상황을 조금 휘젓는 정도이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도처럼, 감정은 변덕스러운 부침 속에서 스스로 사라져간다.

감정에 대해 설명하다보니 수십 년 전 (뉴요커 New Yorker)지에서 보았던 한 컷짜리 만화가 생각난다. 지프 한 대가 산뜻하게 포장된 고속도로를 달리는 그림이었다.
2차대전 당시 새로운 문명현상의 하나였던 지프는 만화의 단골 소재이기도 했다. 거친 지형을 덜컹거리며 달리는 것이 지프의 전형적인 모습이었고, 따라서 대개 땅에서 2피트 정도 떨어진 모습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이 만화에서는 지프가 평탄 도로를 달리고 있었음에도 ‘여전히’ 땅에서 2피트 정도 떨어진 모습으로 그려졌다.

이것이 바로 통제되지 않은 느낌, 즉 감정의 모습이다. 감정은 흥분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도 가슴속에 흥분을 만들어낸다. 확언하건대, ‘의지’는 적절한 통제 속에서 고요하게 움직이지 않으면 절대로 ‘의지력’이 되지 않는다.
통제와 마음의 고요함 없이는 집중도 없다. 마음의 고요함은 둔감함과는 성격이 다르다. 느낌의 기능은 수동적이 될 필요도 없고 고요해질 필요도 없다. 오히려 느낌은 강렬할수록 효과적이다.

원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강한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흔히 하는 말로, 이 세상에 열정 없이 이루어진 일은 없다. 느낌이 강한 의지력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열정이 흥분이라는 형태로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야한다.

양복장이가 사뭇 열정적인 마음으로 아름다운 드레스를 짓고 싶어한다. 한편 이 양복장이는 바늘에 실을 꿰기 위해서는 고요하고 안정된 손놀림이 필요하는 것을 알고 있다. 실을 꿰다가 자칫 실끝이 바늘귀를 벗어나게 되면 실을 다시 뒤로 움직여 재차 시도해야 한다.

의지력의 경우 ‘실’은 느낌의 기능에 비유할 수 있고. ‘바늘귀’는 인간의 육체에서 집중이 구현되는 자리, 즉 양미간 한가운데에 해당한다. 느낌은 이 ‘제3의 눈’을 통해 조용히 외부의 목표를 향해 투사되어야 한다. 느낌을 통제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먼저 가슴의 느낌을 척추를 통해 뇌로 올려보낸 다음, 뇌를 통해 양미간 한가운데에 이르게 하면 되는 것이다. 느낌의 기능을 발달시키기 위해서는 모든 상황은 변하기 마련이라는 생각을 날마다 떠올려야한다. 다시 말해 집착을 버리라는 말이다. 오늘의 행복은 내일 사라질 수도 있다. 오늘의 행복은 내일 사라질 수도 있다. 오늘의 슬픔은 결국 행복으로 바뀌게 되어 있다. 기쁨의 마루와 절망의 골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것이 우리 마음의 실상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일을 더 넓은 시야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의 모든 인생 경험을 지배하고,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우리의 ‘자아’를 지배하고 있는 변하지 않는 실체에 눈을 돌려야 한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의 결과가 되지 말고 원인이 되라. 개인적 우주의 주변에서 살지 말고 중심에서 살라. 진정한 자신이 되라. 남들의 기대와 내 욕망의 메아리가 되지 말라.

당신이 하는 모든 행위를 온전히 의식하라.
또한 ‘지구력’을 기르라.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어떤 것을 성취하려고 마음먹었다면 그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그로부터 마음을 거두지 말라. 우리의 감정이 변덕스러운 것만큼이나, 다시 말해 우리가 삶의 환경에 반응하는 방식이나 환경을 바라보는 방식이 변덕스러운 것 만큼이나, 상황 자체도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라. 변화는 이 세계의 본질이다. 완벽한 실패는 없다. 우리가 노력을 중단하지 않는 한, 실패는 승리로 가는 문이 될 수 있다.
혹자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 만일 모든 것이 어떤 식으로든 변화한다면, 우리가 애쓰지 않아도 성공은 어떤 식으로든 오지 않겠는가 ?

대답은 이것이다. : 만일 세상사가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길에 우리의 의식적 노력을 더하지 않으면, 우리를 성공이 있는 곳까지 밀어 올려줄 수도 있는 그 힘은 우리를 단 몇 센티미터밖에 올려주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올바른 노력을 통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거래를 성사시킬 수도 있는 상황에서 소소한 거래를 통해 단 몇 푼의 이익밖에 얻지 못하는 경우와 하나도 다를 것이 없다. 파도를 잘 타는 사람은 파도 위에 올라타기 위해 균형과 타이밍과 자기통제가 필수적인 알고 있다.

독자들이 품음직한 의문이 또 하나 있다. : 만일 상황이 끊임없이 변화한다면, 우리가 아무리 애를 써도 성공은 결국 와해되고 말 것이 아닌가?
대답은 이것이다. : 어떤 의미에서는 그렇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그리고 훨씬 더 중요한 의미에서는) 그렇지 않다. ‘와해’는 전적으로 잘못된 말이다. 왜냐하면 성공의 파도가 일어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성취를 위해 오르락내리락하는 파도에 목숨을 걸지 않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삶에서 크고 작은 승리를 거둘 때마다 우리가 진정으로 성취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승리이다. 인생 길에서 오르막과 내리막은 끊임없이 뒤바뀌게 되어 있다. 그러나 자신을 지배하는 힘을 갖춘 사람은 외부의 변화에 큰 영향을 받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성공은 우리가 ‘되는’ 무엇이지 ‘이룩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진정으로 성공한 사람에게는 외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이익이 된다. 이런 사람은 결코 가난해질 수가 없다. 모든 것이 그의 차지가 되기 때문이다.

어떻게 집중력을 기를 것인가

집중이란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포함하여 마음을 흩어지게 하는 모든 것부터 마음을 거두어들여 한 가지 대상을 향하게 하는 것을 뜻한다. 집중된 상태에서는 일관된 의식으로 한 가지 대상에 반응하거나 마음이 한 가지 목표를 향할 수 있게 된다.

흔히 사람들은 이와 같이 정신적 통제에 ‘노력’이 따라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런 생각은 잘못된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에서 집중은 ‘노력’을 통해서는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깊은 집중은 이완된 상태에서만 가능하다. 흐트러진 실끝이 바늘귀로 들어가기 힘든 것처럼,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긴장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에너지가 흐트러지게 마련이다. 따라서 예를 들어 걱정으로 눈썹이 찌푸려진다는 것은, 혹은 턱을 꽉 다물고 있거나 주먹을 꽉 쥐고 있다는 것은, 에너지가 그 사람의 진정한 목표를 향하고 있지 않다는 표시이다.

그래서 고도의 집중력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꾸준한 명상 수련을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명상을 하면 결국 현실도피에 이르게 된다는 잘못된 믿음을 갖고 있다. 세상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진실은 이것이다. : 명상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마주치게 되는 도전들을 당당히 대면하게 할 뿐아니라 그 도전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을 길러주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다.

꾸준한 명상의 실천을 통해 얻게 되는 높은 집중력은 평소 같았으면 몇 주를 고민 했어야 하는 문제를 순식간에 해결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의지와 관련해 더 중요한 사실은, 명상을 통해 얻어진 집중력이 모든 종류의 성공에 필요한 강력한 의지를 지극히 자연스럽게 생성시킨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우리 몸에서 의지가 발산되는 곳은 두 눈썹 사이이다. 사람들이 어떤 목표를 향해 강한 의지를 품었을 때 눈썹을 찌푸리게 되는 이류가 바로 이것이다.

명상에서는 바로 이 지점에 집중하라고 가르친다. 왜냐하면 이곳은 집중력이 발현되는 자리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음의 초점을 이 지점에 맞출수록 의지는 더 강력해진다.

집중력을 키우고 의지력을 기르는 데 또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내적 투명성이다. 다시 말해 생각과 느낌의 청명함이 필요하다. 이런 청명함을 기르는 데 커다란 도움을 준다.

필자는 이미 다른 책에서 청명함에 대해 설명한 적이 있는데, 잠시 그 내용을 인용한다.
청명함은 자신과 만물을 더 큰 실재의 일부로 보는 것이고, 그 실재와 의식적인 공명 속으로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며, 삼라만상을 그 실재가 표현되는 통로로 보는 것이다. 청명함은 단순함 속에서 진리를 보는 것이고, 자신의 견해나 욕망, 판단. 현상에 끌려가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그 단순한 진리의 인도를 받고자 하는 것이다.

청명함은 모든 사물을 그 안에 내재한 잠재력과 관련지어 바라보고자 하는 것이다. 청명함은 늘 나의 현실 안에 타인의 현실을 포괄하고자 하는 것이다.

탁한 생각과 느낌은 안팎으로 혼돈을 만들어낸다. 내적 혼란은 집중의 반대말이며, 내적 청명함은 집중과 거의 같은 말이다
마음이 맑을 때에는 자연히 한번에 한가지씩 이야기하게 된다. 반대로, 한번에 한가지 일만 하거나 한가지만 생각하는 습관을 들이면 마음은 점차 청명함을 얻게 된다.

집중을 부정적으로 정의할 경우, 마음에서 모든 잡념과 산란한 느낌을 밀어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특정한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어 ‘빙산에 대해 전혀 생각하지 않겠다’고 결심해보라. 북극지장에 사는 사람이 아닌 다음에는 틀림없이 하루에도 수십 번씩 빙산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집중 훈련이 된 사람이든 되지 않은 사람이든 다 마찬가지다.

따라서 집중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다른 것들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고 애쓰기보다는 한번에 한가지만 생각하는 연습을 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시 말해 부정적인 방법이 아니라 긍정적인 방법을 택하는 것이다.

한번에 한가지 생각에 몰두하라.
동시에 여러 가지 일을 효과적으로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단 몇 분 동안이라도 생각을 집중하기로 결심한 한 가지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보내버려라. 긴장은 금물이다. 몸과 마음을 이완하라.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흥미를 느껴야 한다. 그 일에 빨려들어야 한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스토리가 흥미롭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저절로 영화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어떤 일이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에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여러 해 전에 필자가 가까운 친구 몇 명과 함께 건물 한 채를 매입하는 문제를 놓고 토론을 벌인 일이 있었다. 한창 논의가 진행되던 중에 한 친구가 부동산 중개업자의 연락처를 알고 있다면서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잠깐 꺼내 보였다. 그리고 이야기는 곧바로 다른 화재로 넘어갔다. 15분 후에  마침내 중개업자에서 연락을 취해보자는 결론이 났다.

“아까 그 쪽지를 다시 꺼내야겠군.”
전화번호를 알고 있다던 친구가 그렇게 말하면서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려는 순간, 내가 “번호가 ○○○―○○○○ 이었지 ? ”했다.
쪽지를 꺼내려던 친구가 깜짝 놀란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아니, 쪽지를 잠깐 꺼냈다가 도로 집어 넣었는데…. 어떻게 번호를 기억하고 있지?”
“별거 아냐. 쪽지가 보였을 때 잠깐 집중해서 바라보았을 뿐이야.”

나중에 이 친구가 비슷한 상황에서 내가 이야기한 방법대로 해보았다고 하는데, 여지없이 성공했다고 한다.
무슨 일든 하든 마음을 그 한 곳에 집중할 수 있도록 연습해야 한다. ‘운명을 지배하는 인간’처럼 잔뜩 굳은 표정으로 인생 길을 걸어가라는 말이 아니다. 내 말의 의미는 지극히 간단하다.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흥미’를 가지고 ‘빠져들라’는 말이다.
한번에 한 가지를 하라. 그리고 그 일에 온 마음을 쏟으라.

잠재의식의 벽을 넘어서

만약 우리가 상대해야 할 영역이 일상적인 의식뿐이라면 마을 제어하는 일이 비교적 쉬울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것은 우리의 희망사항일 뿐이다. 일상적인 의식, 즉 인간의 표면의식은 전체 의식 중에서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리의 표면의식 안에는 충족되지 못한 욕망과 해소되지 못한 경향들의 광대한 영역이 존재한다. 이 잠재의식은 우리가 일상적인 의식 차원에서 수행하려고 하는 일을 방해하는 경우가 심심찮게 있다.

내 친구 하나가 인도 – 파키스탄 전쟁 중에 파키스탄을 여행하고 있었다. 고속도로마다 인도의 전투기들이 폭격을 해대고 있던 상황이라 이 친구가 탄 버스는 우회로를 따라 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버스가 개울을 건너다 바퀴가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운전기사는 승객들에게 내려서 버스를 밀어달라고 했다. 승객들이 모두 내린 뒤 15분 지나도 버스는 꼼짝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당황한 운전기사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버스에서 내렸다.

놀랍게도, 뒤에서 버스를 밀고 승객은 절반밖에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앞쪽에서 똑같이 힘을 쓰며 버스를 밀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삶의 실상이다. 우리는 의식 차원에서는 자신이 바라는 목적을 향해 진정으로 열심히 애를 쓰면서도 또 다른 차원에서는 그 노력에 저항하는 의식을 품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일을 하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일을 하지 않고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품고 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시계보기’에 몰두하거나 온갖 공상에 잠겨 있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자신이 하는 일이 어찌되든 상관없다는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이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은 이런저런 일에 대해 생각하느라, 혹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가져왔으면 하는 결과를 앞질러 생각하느라 눈앞의 일에 집중하지 못하고 에너지를 낭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장차 이루었으면 하는 일에 대해 염려하거나 과거에 이루지 못한 일에 대해 안타까워하느라 마음이 흐트러지는 일 없이 한번에 한 가지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고 그 일을 전심전력으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인생에서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

청명함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의식을 하나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을 이루고 있는 본성은 인생을 긍정하지만, 다른 쪽 방의 본성은 인생을 부정한다. 그리하여 의심, 두려움, 걱정 따위가 끼어들어 우리의 가장 좋은 의도에까지 방해를 놓는다.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는 ‘무언의 법칙’이리고 할 수 있는 미묘한 심리가 한 가지 있다. 바로 죽음의 소원 death wish (죽고 싶다는 소원이나 남을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가리키는 심리학의 용어)이다. 이런 심리구조는 문제를 현실 차원에서 대면하지 못하고 회피하려는 마음으로 나타난다. 운명을 농락하듯 끊임없이 닥쳐오는 인생의 문제들을 해결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가 저절로 사라져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런 심리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은 잠재의식에서 알코올이나 약물이나 과도한 수면을 통해 도피처를 찾으려 하고, 결국 의식이 마비되는 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20세기 초반에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의무라고 느끼는 것과 자신이 바라는 것이 사이에 수많은 갈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심리학자들은 이 갈등이 심리적 억압으로 작용하여 내적 콤플렉스를 만들어낸다 하여, 그 해결책으로 사람들에게 하등한 본성에 따를 것을 권고했다. ( 실제로 수십 년 전만 해도 이런 학자들이 많았다.) 이들은 인간의 하등한 본성을 인간의 ‘진정한’ 본성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인간이 지닌 고등한 특성들이, 단순히 자신을 좋게 보이기 위해 위장하려는 하등한 본능의 소산이 아니라는 믿음이 더 일반화되었다. 사랑이 ‘승화된 성욕’에 지나지 않는다는 주장은 옳지 않다. 오히려 성욕이야말로 아직 현실화되지 않은 완전한 사랑을 향한, 궁극적으로 영적인 갈구라고 말하는 것이 더 옳을 것이다.

더 나은 인간 존재가 되라는 요청이 타인들에 의해 외부로부터 주어지는 책임 혹은 의무라는 주장은 옳지 안다. 그런 요청이 사회가 우리를 우리가 아닌 어떤 존재로 만들려는 관습 같은 것이라는 주장 또한 옳지 않다.

의식의 차원을 끌어올리라는 요청은 우리 안의 잠재력에 대한 깨달음에서 나오는 것이다. 더 각성된 삶을 살라는 요청도, 자신의 삶에 대해 책임을 느끼라는 요청도, 무뚝뚝하기보다는 다정해지라는 요청도, 화를 내기보다는 고요한 마음으로 용서하라는 요청도 모두 마찬가지이다. 자신을 향상시킬 의무는 우리 안에서 ‘스스로’ 부과하는 것이다.

우리가 줄 수 있는 것 이상을 사회가 기대하는 경우, 그것은 다른 사람들 역시 잠재의식에서 모든 인간 존재가 더 높은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그런 능력에 대해 눈을 뜨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무한한 자유를 허락함으로써 한 동안은 그 하등한 본능의 아우성을 잠재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자신의 고등한 영적 본성을 묻어버리기 시작하는 순간, 언젠가는 우리를 괴롭히게 되어 있는 영적 사망의 느낌으로부터 다시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영영 막혀버린다.

더 없이 역설적인 사실은, 우리가 자신의 동물적 본성에 굴복한다 해도 그 본성의 아우성을 오랫동안 잠재울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하등한 본능에 굴복함으로써 그런 본성의 명령에서 잠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렇게 굴복하는 행위자체가 그런 본성의 존재 의미를 긍정하는 행동임을 깨달아야 한다.

  분노를 터뜨리면 잠시 분노에서 해방되는 느낌을 누릴 수 있다. 그러나 분노하는 습관은 결코 우리를 해방시켜주지 못한다. 분노에 굴복한다는 것은 결국 분노를 고난의 현실을 넘어가는 수단으로 인정한다는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분노에 ‘올바르게’ 굴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이것이다. : 분노를 표출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일시적인 위안을, 분노와 반대되는 마음상태 (고요함, 용서, 사랑)를 다지는데 이용하는 것이다. 마음이 나를 지배하도록 허용하지 않고 스스로 마음을 현명하게 지배하는 사람은 실패를 승리로 변형시킬 수 있다. 요가난다의 말대로 “실패의 계정은 성공의 씨앗을 뿌리는데 가장 좋은 시기이다.”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인간이 이룩해야 할 승리란 없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사로잡히면 자칫 끊임없는 내적 갈등을 초래하게 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콤플렉스’는 단순히 순종한다고 해서 해소되지 않는다. 현대의 ‘영적 교사’들이 가르치고 있는 바와 같이, 인간의 하등한 본성에 순종함으로써 내적 평화를 구하는 행위는 ‘전두엽 절단술로 알려진 수술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간의 미세한 감정들의 통로인 뇌의 전두엽을 잘라내는 이 수술은 한 때 환자의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수단으로 시행된 경우가 많았다. 그럼으로써 환자를 일종의 애완동물과 같은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 수술을 받은 환자들은 극단적인 불안을 비롯한 여러 가지 콤플렉스에서 해방될 수 있었지만 이상이나 열망과 같이 인간을 하등동물과 구별하게 해주는 고상한 자질들을 모두 상실하고 말았다.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강한 의지력의 바탕이 되는 집중, 평온, 자기통제, 청명함등의 자질이 모두 바로 위의 ‘절단술’에서 잘려나가는 부분인 뇌의 전두엽 안에 존재 한다는 것이다.

집중은 자신을 한 방향으로 몰고 가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든 늘 자신을 억누려고만 한다. 표면의식은 비교적 우리 마음대로 어찌해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우리가 해야 할 작업은 그다지 어렵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표면의식의 적극적인 의지에 대항하려는 또 다른 본성이 자리잡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 앞에는 잠재의식을 상대로 한 더 어려운 (그러나 분명히 가능한)작업이 놓여 있다.

우리는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 안에서 벌어지고 고통스러운 전쟁을 피해갈 수 없다. 인도의 위대한 고전인 (바가바드기타)에서 인간 삶의 무대를 전쟁터로 설정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긍정적인 확신을 품으라

오래 전의 일이지만, 필자는 스무 살 때까지 담배를 하루에 한갑 정도 피웠다. 그러다 스무 살을 얼마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서 나는 그 불쾌한 습관을, 한편으로 너무나 유쾌한 습관을 끊어버리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여러차례의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나서 오전까지 담배를 참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점심을 먹고 나서 커피를 마실 때만 되면 너무나도 허전한 느낌에 도저히 흡연 욕구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흡연은 세상에서 가장 끊기 쉬운 습관이다. 나는 금연을 천 번도 넘게 해보았다.”고 했던 마크 트레인의 경우를 그대로 닮아갔다.

만일 내가 결심을 깰 때마다 그것을 실패라고 생각했다면, 결국 ‘나 자신’을 실패한 인간으로 규정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금연에 실패할 때마다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직’ 성공하지 않았어.”

그리하여 나의 이런 긍정적 확신은 비록 아직은 실제로 일어나지 않았지만 하나의 잠재적인 성공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어느 날 저녁, 나는 잠자리에 누워 있다가 ‘늦어지고 있는 성공’에 대한 그 동안의 긍정적인 확신이 모여 마침내 내  안에 단호한 결심으로 자리잡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 순간 방에 들어선 룸메이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담배를 끊어가고 있어.”

“그래?” 친구가 놀리듯이 말한 뒤 덧붙였다. “전에도 그런 말을 들을 것 같은데!” 그리고는 가벼운 웃음을 흘리며 방을 나갔다.
그러나 나는 이날만은 단단한 확신이 느껴졌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어난 나는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와이셔츠 주머니에 들어 있던 마지막 담배 한 갑을 그 후 2주 동안 친구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나는 한번도 담배를 피우고 싶은 욕구를 느낀 적이 없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진정한 실패는 우리가 어떤 일을 실패로 규정했을 때에만 찾아온다는 것이다. 실패를 겪을 때 마다 그것을 성공으로 가는 계단으로 만드는 일은 너무나도 쉽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가 실패를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문제일 따름이다. 따라서 우리는 “나는 실패했어!” 하지 말고 “나는 아직 성공하지 못했어!” 해야 한다.

월리엄 1세 ( 1027~1087 잉글랜드의 왕으로 노르망디 왕조를 창시한 정복왕)가 헤이스팅스(영국 잉글랜드 동남부 , 서식스 주 동부의 항구 도시, 1066년 월리엄 1세가 이 근방에서 앵글로색슨 군대를 격파했음)에 상륙했을 때, 그가 처음 한 일은 발부리가 걸려 넘어지는 일이었다. 이 불길한 전조에 휘하의 병사들은 숨을 죽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위대한 의지력의 소유자였던 월리엄은 땅에서 일어서면서 이렇게 외쳤다. “이 땅을 정복하고자 하는 나의 의지는 더 없이 강렬하도다. 보라 그래서 내가 이렇게 두 손으로 이 땅을 움켜쥐지 않았는가!”

이 외침에 병사들은 사기가 충전하여 커다란 함성을 질렀다. 결국 이 날 월리엄의 군대는 역사에 길이 남을 대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강렬한 의지에 솟아나오는 긍정적 확신은 잠재의식에 복종을 ‘강제’하는 힘이 있다.

중요한 것은, 잠재의식을 향해 ‘명령’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의지는 장군처럼 행동해야 한다. “부하들이 알아서 잘하겠지”하고 가만히 있어서는 아무 일도 되지 않는다. 병사들이 자신을 따르리라는 순진한 희망만으로 돌격을 감행하는 장군은 어리석다. 병사들은 명령을 받아야 움직인다. 모름지기 군사지도자는 병사들을 분발시켜 자신에 대해 믿음을 갖게 하고 자신의 계획에 대해 신뢰를 품게 해야한다.
따라서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잠재의식을 거느리고 해야한다. 잠재의식에서 보내오는 갈등의 메시지를 무시하면 아무 일도 안 된다. 우리는 표면의식이 내린 결단과 손을 잡을 수 있도록 잠재의식을 분발시켜야한다.

나는 사람들이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수고 없이 보았다. “나에게는 그런 자질이 있으면 안 돼. 따라서 ‘나에게는 그런 자질이 있으면 없어.’ 나는 화를 내면 안 돼, 따라서 내가 보여준 것은 분노가 아니야. 다만 잠시 성급했을 뿐이야. 나는 도덕적으로 나약해지면 안 돼. 따라서 내가 비난받아야 할 이유는 없어. 자신의 나약함을 나에게 전가했던 저 사람들이야말로 나약한 사람들이야.”

병사들의 불만 사랑이 상달되지 않으면 언제 항명사태가 벌어질지 모른다. 잠재의식이란 그런 것이다. 잠재의식은 결코 무시하면 안된다. 그러나 잠재의식에 속구 무책으로 끌려갈 필요도 없다. 결국 잠재의식은 우리의 명령을 받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잠재의식을 나의 병사로 거느리기 위해서는 잠재의식을 정직하고 당당하게 대면해야 한다.

장군이 휘하의 병사들을 하나하나 알고 있을 필요는 없다. 장군은 병사들의 개인신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해도 얼마든지 그들을 자신의 목적에 복종시킬 수 있다. 그 방법은, 병사들이 존경하고 복종할 만한 종류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이다. 잠재의식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표면의식이 내린 결심에 방해가 될 만한 잠재의식상의 요인을 일일이 대면 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잠재의식의 지원을 이끌어낼 수 있을 만한 흡입력과 단호함으로 명령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남들이 지니고 있는 과거의 상처를 들추어내고 억눌려 있던 성향들을 뒤적거리는 경우가 많다. 장군이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는 병사들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쓰면서 그들의 태도에 대해 과도한 우려를 품는다면 결국 병사들의 부정적인 성향에 힘을 실어주게 될 뿐이다. 장군이 병사들을 높여서 부정적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병사들이 사라지도록 만드는 일이 가능하다.
만일 장군이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병사들의 불평불만이 정당하다고 생각된다면,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자신의 지위를 흔들림 없이 유지하는 길이 될 것이다.

긍정적 확신이 지성적으로 사용되었을 때에는 위력적인 무기가 된다. 그러나 현명하지 못하게 사용되는 경우,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카펫 밑으로 쓸어넣는 도구로 전락하고 만다. 반대로 현명하게 사용되면 자신의 약점들을 당당하게 직시하면서 오히려 그 약점을 향해 “모습을 드러내라!”하고 명령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오래 전 그 날 내가 잠자리에 누워 “마침내 정말로 담배를 끊었다.”고 선언했을 때, 나는 무의식적으로 잠재의식을 향해 명령을 내린 셈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의 잠재의식은 잠들기 직전과 잠에서 막 깨어난 순간에 표면의식의 명령에 가장 민감하게 순응하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경험했을 것이다. ‘너무 피곤해!’하는 생각을 하며 잠자리에 들면 아무리 오랜 시간을 자도 다음날 아침에 여전히 피곤이 느껴지는 법이다. 반대로,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푹 자고 나면 가뿐해지겠지’하며 잠자리에 들면 다음날 아침에 정말로 몸이 가뿐하게 느껴진다.

긍정적인 확신을 보내고 싶은 일이 있을 때에는 잠자리에 들 때 특별한 시점을 정해서 그 생각을 잠재의식에 심으라. 그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는 순간, 아직 잠재의식이 개방되어 있을 때 그 확신을 다시 한번 보내라. 이 방법은 우리의 인생을 단기간에 더 나은 삶으로 바꾸어준다.

잠재의식을 표면의식의 계획과 결합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명상이다. 명상이 가져다주는 평화는 우리의 깊은 의식층으로 스며든다. 나아가 명상수련은 우리 마음이 표면 의식과 잠재의식과 초의식이 통합된 하나의 총체적 실체임을 인식할 수 있게 해준다.
인간의 고등한 본성은 우리 몸 중에서 뇌의 전두엽에 집중되어 있다. 잠재의식도 이곳에서 멀지 않은 뇌의 뒤쪽과 척추에 위치해 있다. 명상은 뇌의 뒤쪽에 있던 우리의 의지를 앞쪽의 양미간으로 옮겨올 수 있도록 해준다. 이 방법을 통해 우리는 표면의식 차원에서만 의도를 품는 것이 아니라 잠재의식까지 의지의 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잠재의식의 도움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거의 없다.
확신의 법칙을 실천하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1. 확신의 내용을 큰 소리로 반복해서 표면의식의 주의를 끌어온다.

2. 똑같은 내용을 한결 부드럽게 반복해서 표면의식의 관심을 끌어온다.
3, 같은 내용을 속삭이듯이 반복해서 잠재의식의 도움을 유도한다.

4. 말을 하지 말고 마음 속으로 잠재의식안의 생각과 성향들을 의지의 행위 안으로 끌어온다.

5. 마지막으로 깊은 내적 침묵 속에서 자신의 의지를 자신의 고등한 영적 본성을 향해, 즉 초의식을 향해 제공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확신의 내용이 긍정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렇게 말하지 말라. “다시는 담배를 피우지 않겠다.” 대신 이렇게 말하라. “나는 담배를 끊었어.” 대신 이렇게 말하라. “나는 담배를 끊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더 이상 그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라. 자신이 이미 내적으로 그 문제에서 자유로워졌다고 생각하라.

긍정적인 접근이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부정적인 확언은 우리가 극복하고자 하는 현실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긍정적인 확언을 통해 고등한 본성의 명령과 공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초의식의 본성은 해결을 지향하고 있다. 초의식은 우리의 운명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궁극적인 힘이다. 초의식의 이런 본성과 공명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부딪히고 있는 문제에 지나치게 사로잡혀서도 안 되고, 반대로 눈앞의 문제를 외면해서도 안 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떤 문제든 해결책이 있다는 확신을 품고 의지를 최대한 발휘하는 일이다.

확언하건대, 당신이 이상의 원칙들을 제대로 실천한다면 반드시 정답을 얻게 될 것이다. 당신을 둘러싸고 있던 벽이 사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그 뒤로 펼쳐진 드넓은 초원과 높은 산맥을 보게 될 것이다. 그 초원의 이름은 확장된 의식이며, 그 초원의 이름은 확장된 의식이며, 그 산맥의 이름은 확장된 힘이다.
그러므로 언제나 해결을 지향하는 존재가 되라.!

에너지는 자기력을 만들어낸다. 에너지의 흐름이 강할수록 자기력도 커진다. 자기력은 우리가 인생에서 얻게 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끌어당기는 힘이다.

자기력의 세기는 우리의 의지에 딸린 긍정의 강도에 결정된다. 긍정적인 생각은 자기력을 강화시킨다. 부정적인 생각은 자기력을 약화시킨다. 유쾌한 마음은 자기력을 가져다준다. 실의는 자기력을 잃게 만든다. 희망은 자기력에 힘을 더해준다. 증오와 무관심은 자기력을 무디게 한다. 믿음은 자기력을 만들어낸다. 의심은 자기력을 파괴한다.

그러므로 언제나 긍정적인 사람이 되라. 언제나 밝은 마음을 지닌 사람이 되라. 언제나 희망과 믿음과 사랑으로 가득 찬 사람이 되라.

“현실 속에서 이상을 추구하라.”

이 장의 제목에 큰 따옴표를 친 이유는 이 문장이 언젠가 파라마한가 요가난다가 필자에게 들려주었던 조언의 한 대목이기 때문이다. 나는 요가난다의 조언 역시 올바른 것이었음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에너지가 지향해야 할 곳은 결국 실질적인 성취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열망 더하기 에너지”라는 표현은 정확한 답이 아니다. 정답은 ‘성취를 향한 욕망 더하기 에너지’이다

실질적인 결과를 얻어내지 못하는 의지력은 결국 와해되고 만다. 의지는 현실 속에서 효과를 발휘하지 못하면 사위어가게 되어있다.
사람들은 달성이 불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설사 자신이 설정한 최고의 이상에 한참 못 미치는 것으로 생각되더라도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는 편이 훨씬 낫다. 왜냐하면 작은 성공들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힘을 보태줄 것이고 이 힘이 모여 결국 진정으로 위대한 승리를 얻도록 해줄 것이기 때문이다.

여러 해 전에 나는 친구 서너 명이 벌였던 사업이 실패로 돌아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한 걸음씩 내딛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그리고 눈앞의 현실에서 너무 멀리 벗어난 성공을 장담하지 않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은 적이 있다. 이 사례를 통해 난 자신의 실질적인 경험을 넘어서 한 걸음 이상 신념의 힘을 시험하지 않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임을 절감했다. 이 친구들은 자신들은 물론 자신들이 알고 있는 모든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줄 사업을 시작했다. 처음 얼마 동안은 모든 것이 훌륭하게 느껴졌다. 이들의 계획이 실현된다면 그 이상 좋을 것은 없었다. 긍정적 사고의 힘을 확신하고 있던 이들은 적지 않은 부채를 떠 안게 될 때까지도 수백만 달러를 벌 수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당면 문제들이 흘러가고 있는 강을 확고부동한 신념이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다리를 통해 건너가야 한다는 것이 이들의 믿음이었다.

그러나 나의 눈에는 그들의 사업에서 확신과 긍정적인 사고만 가지고는 해결될 것 같지 않은 심각한 문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회사의 생존이 염려가 된 나는 조언을 들려주고 싶은 마음에 친구들을 우리 집으로 초청했다. 그리고 내가 느끼고 있던 점을 일일이 열거하면서 위기상황을 벗어날 수 있는 실질적인 제안을 했다. 그 무렵에는 친구들도 사업이 파산 직전에 처해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가 돌려받은 것은 적대감뿐이었고, 결국 사업은 망하고 말았다. 마치 그들이 잠재의식에서 사업이 망하기를 ‘원하기라고’ 한 것 같았다. 모르긴 해도 그 친구들이 실제로 원했던 것은 책임감을 갖고 현실 속에서 성공적인 기업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성공하기 위해 노력 했다는 자기만족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말로 하면, 그들의 시도는 자신의 양심에 바치는 뇌물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이유는 내가 그 사례에서 배운 교훈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어서다. 첫 번째 교훈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확신과 긍정적인 사고를 현실과 결합시키는 일이 극히 중요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교훈은, 고집스러운 몽상가들은 현실적인 면을 고려하라는 이야기에서 위협 같은 것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현실적인 주장을 자신의 이상주의 대한 공격으로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꿈이 사실에 의해 훼손당하지 않아야 그 꿈을 순수하고 고상하게 유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이상을 실질적으로 구현하는 작업이 반드시 그 이상을 더럽히는 일은 아니며, 현실이 반드시 이상주의를 손상시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우리가 인생에서 성취해야 할 나만의 몫을 얻어내기 위해서는 현실을 자신의 고상한 목적에 봉사하도록 만드는 길 밖에 없다.

돈을 끌어오고 싶은가 ? 사업에서 성공하고 싶은가 ? 그렇다면 당신의 마음속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히 하라. 당신의 마음속에서, 당신의 가슴속에서, 당신의 삶이 취하는 모든 방향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명확히 하라. 수정 같은 투명함을 얻으라. 청명함을 얻으라.

성서는 우리에게 말한다. “그대의 모든 얻음 속에서 이해를 얻으라.” 무슨 일 하든 그 일이 습관이나 타성이 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또한 다른 사람들의 기대를 반영하여 수동적으로 행해지는 일이 되어서도 안 된다. 무슨 일이든 자동적으로 행해져서는 안 된다  모든 일은 언제나 ‘의식적으로’ 행해져야 한다.

이 조그만 책이 이해의 한계를 넓혀가려는 당신의 노력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렇게 해서 확장된 이해가 당신이 인생에서 가장 절실하게 원하는 것을 가져다주리라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