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변화

<대한민국 60년>  사회변혁 이끈 미디어

여론형성 독점 끝나고 ‘1인 미디어’ 시대 진입
“참여형 수용자 사로잡지 못하면 선진화 난망”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를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했지만 미디어업계가 주목한 것은 몇몇 개인과 단체가 시도한 집회 현장
의 인터넷 생중계였다.
촛불집회가 절정에 이른 6월10일 하루 동안 나우콤 인터넷방송 서비스  ‘아프리
카’에서는 1천357건의 생중계가 이뤄졌으며 모두 70만여 명이 시청한 것으로 집계됐
다. 동시 시청자수가 최고 5만여 명에 이르기도 해 기존  방송미디어  시청점유율을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인터넷 생중계를 주도한 이른바 ‘1인 미디어’들은 네티즌들을 흥분시켰다. 기존
방송이 커버하지 못하는 현장 상황을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상세하게 전했기 때문이
다.
대한민국 60년 동안 미디어는 세상을 바꾸는 역할을 하면서 그 자체도 급성장하
고 급발전했다.
일제 강점기에서 벗어났을 때 우리 말 신문은 총독부 기관지였던 매일신보,  방
송은 일본이 식민지 정책 일환으로 1927년 개국한 경성방송이 유일했다.
올해 3월10일 현재 문화체육관광부가 집계한 전국 일간신문은 285개. 여기에 특
수신문과 외국어신문 등 기타 일간신문 363개를 비롯해 주간지(2천894개), 월간지(3
천283개) 등을 더하면 등록된 정기간행물은 9천571개에 이른다.
방송 역시 마찬가지다. 방송통신위원회의 2007년도 방송산업 실태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지상파TV 33개와 지상파 라디오 11개, 지상파 이동멀티미디어방송(DMB)과 일
반위성방송, 위성DMB 각 1개, 종합유선방송(SO) 107개 등 모두 531개 방송사업자가
다매체 다채널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
성동규 중앙대 신문방송대학원장은 “매체융합 등 기술발전의 속도로 볼 때 과거
100년이 지금의 1년과 비슷하다”면서 “1883년 우리나라 최초  근대신문  한성순보가
발행된 이후 수십 년간 선택된 소수매체가 독점해온 사회적 의제설정 기능도 1990년
대 중반 이후 인터넷이 대중화하면서 ‘미디어 소비자가 곧 미디어 생산자’인 시대를
만들어냈다”고 말했다.
건국이후 지난 60년간 우리 사회가 후진국에서 벗어나 선진국  문턱에  이르고,
동족상잔의 전쟁과 독재정권을 극복하고 민주화를 이룬 역동성의  기저에는  사회적
소통도구로서 미디어의 역할이 적지 않은 것으로 평가된다.
예컨대 1960년 4월 마산 앞바다에서 눈에 최루탄이 박힌 시신으로 발견된  김주
열 학생의 사진 보도는 4.19혁명을 불붙게 했고, 신문에 폭로된 박종철 고문치사 사
건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정진석 한국외대 언론정보학부 명예교수는 “개화기 이후 신문이 주도해온  우리
나라 미디어 시장은 정치상황의 변화 속에서 부침을 거듭했다”면서 “지난 60년을 돌
이켜보면 정권의 변화에 따라 신문의 숫자가 급격히 늘고 줄어드는 일이 반복됐는데
외국에서 찾기 힘든 독특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1948년 8월 수립된 정부는 표현의 자유를 보장한 미군정의 언론정책을 계승했고
이에 따라 언론시장도 번성했다. 하지만 이승만 정권은 동아일보와  경향신문  등이
정부 비판지로 돌아선 이후 언론탄압의 강도를 더해가다가 1959년 경향신문을  폐간
했고 이듬해 국민적 저항에 부딪혀 무너졌다.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또 다시 매체 창간붐이 일어났다. 4.19 이전과 비교했을
때 1961년 2월 말 현재 정기간행물 등록 수는 신문이 41개에서 112개, 주간지가 136
개에서 469개, 뉴스통신이 14개에서 261개, 월간지가 400개에서 458개 등으로  급격
히 늘었다.
이어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언론시장이 과열양상으로 치닫는다고 여기고 대대적
으로 정비했다. 언론통제는 1980년 신군부로 이어져 언론사상 최대의 인위적 구조개
편이 이뤄졌다. 이른바 ‘언론기본법’에 기초한 언론통폐합이 단행됐고, 이 무렵  언
론사를 떠난 언론인이 1천917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정권의 변화에 따라 큰 폭으로 증감했던 매체 수 현황은 시대적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회적 메시지이자 언론민주화의 척도였다.
최영묵 성공회대 교수는 “유신정권에 의한 1975년 동아일보 광고탄압과  해직사
태는 1980년대 출판문화운동의 계기가 됐고, 1980년대 신군부의 언론인 강제해직 등
은 1987년 6월 민주화운동 이후 한겨레신문 등 진보매체가 탄생하는 배경이 됐다”고
설명했다.
기존 미디어의 또다른 한 축인 방송은 1960-70년대에 급팽창하며  우리  사회의
여론주도매체로 자리 잡았으며 대중문화 확산을 몰고왔다.
우리나라 첫 상업방송인 부산문화방송을 시작으로 서울문화방송, 동양방송이 잇
따라 개국하면서 목소리 좋은 성우와 아나운서 등이 1960년대 대중스타 자리를 차지
했다. 이 시기에 성우 고은정ㆍ임국희, 아나운서 임택근, DJ 이종환 등  라디오스타
들이 탄생했다.
이후 KBS TV가 1961년 12월 31일, TBC TV가 1964년 5월 9일, MBC TV가 1969년 8
월 8일 전파를 내보내면서 우리 사회에 방송영상시대가 찾아왔다.
KBS TV 개국 직후 전국의 텔레비전 수상기 수는 약 2만대였다.  그나마  정부가
텔레비전 보급을 위해 일본에서 면세로 도입해서 월부로 판매한 수상기였다. 이후 1
968년 11만8천262대, 1973년 128만2천8천617대, 1984년 760만415대로 급증세를 보였
으며 이제는 흑백 TV는 물론 컬러TV 수상기까지도 보급률을 따로 조사하지 않을  정
도가 됐다.
이 과정에서 KBS는 1980년 12월 1일 오전 10시30분 제17회 수출의 날 기념식을
실황 중계하는 것으로 컬러TV 시대를 열었다. 흑백TV를 드물게 보유한 집에 모여 앉
아 프로레슬러 김일의 경기에 열광하던 시절은 이렇게 저물어갔다.
1995년 1월부터 방송돼 시청률이 64.5%에 이르렀던 드라마 ‘모래시계’는 방송시
간에 거리와 술집이 텅 빌 정도여서 이른바 ‘귀가시계’ 신드롬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지상파 드라마가 누린 이런 폭발적 시청률도 이젠 전설이 돼가고 있다.
방송통신 융합에 따른 IPTV 보급, 인터넷 다시 보기 등 기술발달로 시청자들은
방송사들이 일방적으로 편성한 방송시간에 묶여있지 않게 되면서 이처럼 높은  시청
률은 불가능한 상황이 됐기 때문이다.
이창현 국민대 언론정보학부 교수는 “매체융합 등에 따라 특정  소수  미디어가
다수 독자나 시청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제공하던 흐름의 전통적 패러다임이 네트워크
형식으로 바뀌었다”면서 “그런 점에서 촛불집회에서 드러난 전통매체와 인터넷 포털
사이트의 치열한 싸움은 미디어 권력의 재편을 알려주는 서막과도 같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인터넷 방송과 블로그 등 참여형 개인 미디어의 발달은  전통매체로
부터 뉴스를 일방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고 뉴스 생산에 적극 참여하는 새로운
유형의 수용자를 만들어내고 있다”면서 “이미 변화한 뉴스 수용자들의 마음을  사로
잡지 못하면 매체융합시대에 걸맞은 언론 선진화를 이루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했
다.
ckchung@yna.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