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과 나

일본을 처음 느꼈을때는

내가 일본이라는 나라를 알게된것은 언제쯤일까?
아마도 초등학교 저학년 때 일것이라고 생각된다.
매년 맞는 광복절때 일본의 식민지 통치와 조국해방에 대해 들었을 것으로 본다.
언제라고 확실한 기억이 나지 않는것은 머리속에 각인될만큼의 역사교육이나
일본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계기가 없었기 때문이다.
북한에 대한 경각심이나 6.25에 대해서는 포스터그리기와 표어 모집등으로
초등학교 저학년때 부터 이어졌지만 일본의 과거역사에 대해서는 어렴풋한 이야기밖에
머리속에 기록되지 않은것 같다.
당시 아버지의 서재속에서 발견한 일본서적들과 아버지의 일제시대 중학교
앨범속에서 본 일본인 선생, 가마니짜기 사진등도 역사속의 부정적인 분노 등으로는
연상되지 않은것 같다.
당시는 한국전쟁이후의 가난한 시절이었던 만큼(내가 태어난 해는
일제로 부터 해방된뒤 8년후이자 6.25전쟁이 휴전되던 1953년 이었다.)
2차대전후 일본과 독일이 전후 가난을 극복한 내핍생활이 오히려 강조
되었다고나 할까.
역사교육을 통한 일제시대의 인식이 그저 그렇게 기억돼 나가는 동안
중학교때인 60년대 중반에는 우리마을에 일본으로부터 돌아온 개선장군?이
있었으니 이 사람들은 일본을 동경의 세계로 인식시키기에 충분했다.
나 한테는 이때가 일본을 처음느낀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어떤 낯선사람이 마을을 찾아들었을때 그 사람과 관련되는듯한 사람들이
서로 껴안고 울음바다를 이루고  온 마을 어린이들은 그 행렬을
따라 가며 신기해 했으니 말이다. 이 낯선 사람은 바로 일본에서 온 재일동포 였다.
그후 문제의 그 재일동포 아저씨가 되돌아 갈때 까지 온갖 소문이 뒤따라 다녔으나
우리들한테 와 닿은것은 그 아저씨가 일본에서 많은돈을 벌어와
동생 친척들에게 많은돈을 주고 갔다는 사실이었다.
그 아저씨는 아버지와 같은 나이인데도 어렸을때 살기가 어려워 일본으로
건너 갔으며 (해방전? 후? ,10대 후반? 20대 초반?에 징용이 아닌 자발적인 방일)
일본에서 성공했다는 사실이 더욱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래서 나는 은근히 그분이 친구뻘인 우리 아버지를 도와줄 수도 있을것이라는
상상도 해보았으며 우리 아버지는 왜 당시에 일본으로 같이 가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당시 우리에게 일본은 우리보다 잘사는 나라일뿐만 아니라 돈많은 동경의 나라쯤으로
인식되기에 충분했다.
비슷한 시기에 또 다시 나타난 또 한 분의 재일동포 아저씨는 이같은 일본에 대한
동경심을 다시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됐다.
그 아저씨의 친척들은 갑자기 논이 불어나고 상급학교 진학도 보다 손쉬워 졌다.

    그로부터 30년뒤
1995년 10월 부터 일본생활 (YTN 특파원)을 하는동안 나는 30년전의 그때를 생각해보며
당시 그분들이 일본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을까 생각하면서 또 다른 일본을 느꼈다.
내가 일본을 동경? 할 당시로 부터  30여년이 흘렀으니 한국의 생활도 많이 나아지고
더구나 초 .중학교 시절이후  일본과의 과거역사와 일본이란 나라를 다시 인식하게
되면서 일본에 대한 동경도 실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경제격차와 기술수준. 의식수준 차이를 인정하면서도 돈많은 일본.일본사람 이라는
동경은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특히 1960년대 당시 동경?의 대상이었던 그분들의 그당시 일본생활은 30여년이 지난 지금의
재일동포 생활과 차별받는 응어리를 보고 느끼게 되면 더욱 말할 필요조차 없게 된다.
돈도 벌만큼 벌고 한국의 고향도 자주찾고 일본에서 번 돈을 한국으로 들여와 큰 사업을
벌이는 사람들도 과거의 힘들고 마음고생했던 생활들을 생각하면 현재를 아무리 미화해도
마음속에 남아있는 회환만큼은 사라지지 않을것이라고 생각됐다.

            가깝고도 먼 나라

    내가 1960년대에 그저 동경?했던 나라. 그후 동경이 현실로 바뀌고 마음속에는 어쩐지
찜찜한채로 남아있음에도 기술수준과 의식수준, 국가 공동체 정신등
한국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여러가지 면에서는 가끔씩 동경해 마지않았던 일본에서
내가 직접 살아볼 수 있는 기회가 온것은 YTN특파원으로서 가족을 이끌고 일본에 처음
도착한 1995년 10월 20일이다.
    너무 흔해빠진 표현이 되고 만 `가깝고도 먼 나라` 일본은 결코 가깝지가 않았다.
아침 9시 반 비행기를 타기위해 7시쯤 집을 나서 일본에 도착해 도쿄 세타가야구(世田谷區)
복덕방에 도착한시간이 오후 3시였으니까 말이다.
    거의 하루가 걸린 셈이다.
아무튼 지리적. 시간적 거리는 그렇다 치고 문화적 .감정적 거리는 어떠한가?
기자 생활을 하면서 일본에 대한 기사를 접하고, 해마다 연례적으로 이어지는
3.1절, 8.15 광복절, 그리고 수시로 일제시대의 죄악상을 폭로하는 문서,증인등이
나타날때 마다 일제의 죄악상을 보도 했으니 그 감정이 어디가랴.
그래도 정확히 보고 정확히 전달하자고 마음을 먹었으니 이제부터는
일본을 정확히 아는것만이 문화적. 감정적 거리도 좁힐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일본 채류 임기 3년이 지나면 한.일간의 거리뿐만 아니라 문화적.감정적 거리도
더욱 가까워 지기를 기대하면서 일본배우기에 들어갔다.
    부임 초기의 다짐은 TBS 동경방송의 사보에 기고한 글에도 나타난다.

            일본은 비교적 규격화된 나라

   일본에 부임하기 한 달여 전에 미리 집을 얻고 지국 사무실을 꾸미기위해
1주일 정도 일본에 다녀 오면서 느끼기는 했지만 한국처럼 `적당히’가 통하지 않고
원칙을 지키는 나라, 원칙이 체질화된 사회였다.
외국인들, 특히 한국사람들이 맨 처음 부터 불편을 겪는다고 생각하는 방얻기 부터가
원칙 그 자체 였다. 요즘에는 많이 달라졌다고 이야기 하지만 반드시 일본사람을
보증인으로 내세워야 하는 원칙 부터가 그러했다. 처음 일본에 도착하는 사람이
어떻게 일본인을 보중인으로 내 세울 수 있을까? 그러나 원칙은 원칙이었다.
    다행히 東京방송-TBS의 도움(외신부 후쿠이 부장)으로 보증인을 세울 수 있었지만
이것은 외국인 누구나 겪는 어려움이며 특히 한국인의 경우 집주인이 방을 세주는 것
조차 거부하는 경향도 있었으니  재일동포들의 그동안의 고난도 이해될만 했다.
한참뒤 재일동포들과 사귀게 되면서 그들의 옛 설움을 직접 들을 기회가 있어 더욱
이해가 되었으나 지금(96-99년)은 그래도 많이 나아진 편 이라고 했다.
수 십년을 일본에서 살아오고 2세, 3세까지 살고 있으나 귀화하지 않고 한국국적을
가진채 거류중인 동포들은 아직도 집을 얻는것이 귀찮은 일이며 반드시 일본인의
보증을 세워야 하는 실정이고 보면 어지간한 민족정신이 아니면 자녀교육 문제와
취업문제등을 고려해 도쿄등 도시로 이사한뒤 아무도 모르게 일본인으로 귀화하고
일본인 행세를 한다고 해서 욕할 수만은 없는것이 재일 한국인의 현주소 였다.
    여하튼 일본에서는  집을 세들때 반드시 일본인 보증인을 세우는 시대에 좀 뒤떨어진?
(일본인들은 내가 이상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보증인 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일본인 자신들도 예외가 아니니 그 나라의 하나의 관습과 원칙이라고 좋게 이해하려고
했다가도 세입자 입장에서만 보면 짜증나는 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입주를 위해서는 첫 달에 보통 2개월 분의 보증금에, 2개월분의 사례비에, 1개월분의
복덕방비, 뿐만 아니라 두 달치 집세도 미리 내는데도 또 다시 일본인 보중인을 세워야 하니 완전한 안전장치만을 강조하는 집주인이 야속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이것도 원칙이라는 이름 아래서는 외국인의 설득력이 약할 수 밖에.
   그때 부터 나는 내가 살아온 체험상의 기준을 다시 생각하면서 섣불리 내 기준으로
결론을 내리는것을 가능한 자제하려고 노력했다.

                한국인과 일본인

기본이 갖춰진 나라? 나에게 선진국의 조건을 하나만 들라고 하면 서슴없이 말 할 수 있는
조건이 바로 “기본이 갖춰진 나라”이다.
남을 배려하고 질서를 잘 지키고 끝 마무리를 잘하는 사람들이 많으면 기본이 갗춰진 나라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과 일본인, 한국과 일본을 비교 한다면 일본은 기본이 서 있는 나라라고 말하고 싶다.

한국인은 법과 질서를 무시하고 나 혼자만 살겠다고 아우성이고 끝마무리를 대충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나라의 보수센터 직원이 무엇인가 수리하러 왔다고 치자. 맨 먼저 약속시간을 믿을 수가 없다.약속 시간이 됐는데도 오지는 않고 그렇다고 몇분쯤 늦겠다는 전화도 없고 사무실로 전화를 하면 곧 갈것이라고 말하거나 잘 모른다고 답변하기 일쑤다.
뒤늦게 아니면 몇차례의 약속을 어기고 며칠만에 와서도 작업을 하기위해 의자를 가져오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공구도 안 가지고 와서 공구를 달라고 한다. 공사를 마친뒤 뒷처리는
또 어떤가. 이런것들에 습관이 된 우리는 그러려니 하지만 일본에서 이같은 수리를 해본
경험이 있다면 아하 이래서 선진국이라고 말하는구나 하고 저절로 탄식이 나온다.
약속시간에 정확히 도착해 (출발전에 미리 전화로 약속 시간과 위치를 다시 확인하는 것은 물론 도착 할 수 없는 상황이 발생하면 꼭 연락을 하고 언제까지는 도착할 수 있는데
그때까지 가도 괜찮은지 …… ) 먼저 일할 장소에 담요나 종이를 깔아 바닥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한뒤 수리를 하고 나면 주변에 떨어진 먼지까지 깨끗이 치워 가지고 간다. 그리고
고장원인과 사용법등을 다시 한번 일일이 시범을 통해 보여주고 직접 해 보도록 한다.
제품에 대해 끝까지 책임지는 책임의식과 철저한 서비스 정신, 다은 사람의 시간을 중요시 하며 반드시 지키는 약속, 뒷마무리를 깨끗이 하는 몸에밴 생활태도는 바로 기본이 바로선
나라이자 선진국 으로서의 기본이 갖춰진 나라라고 느끼지 않을 수가 없다.
생활속에 배어있는 깨꿋한 마무리 정신은 제품에서도 그대로 나타나 불량률을 줄이고 선진 일등제품을 만들어내는 원동력이 되고 있다.

           정보력이 국력

  일본은 정보를 어떻게 수집하고 축적해 나갈까?
내가 특파원 발령을 받고 비자를 내려고 서류를 준비하면서 느낀것이지만

          노출로 제어한다.-불법 채류자 문제